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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회의 변동

by 대군장 2022. 11. 19.

(1) 조선후기의 정치
(1)-1. 양난의 발생과 수습

1) 붕당정치의 성립
- 시기: 선조무렵 사림의 정계진출과 장악 / 숙종대 환국까지를 붕당정치라 통칭
- 성격: 정치이념과 학문에 따라 형성된 붕당들의 상호 존재 인정 / 공론에 입각한 정치형태

- 붕당의 분화
ㄱ. 동인-서인: 정국 운영 방안을 놓고 기성사림과 신진사림 대립(이조전랑직 문제)
  ㄱ-1. 서인: 기성사림(명종시기 참여), 척신정치(심의겸) 청산에 소극적, 이이가 문인에 가담함
  ㄱ-2. 동인: 신진사림(김효원), 척신정치 배격, 이황 조식 서경덕의 학문 계승

//* 이조전랑
개념: 문관의 인사행정을 담당하던 이조의 정5품관인 정랑과 정6품관인 좌랑직의 통칭
특징: 홍문관 출신의 명망있고 젊은 문신 중에서 선임
특권: 통청권(삼사의 청요직 선발), 낭청권(재야인재 추천), 자대권(후임전랑의 지명) 등 보유
*//


** 이조전랑의 역할 / 이중환 , [택리지]

이조가 권력이 무거워지는 것을 우려하여 3사 관원의 후보 천거는 이조판서에게 맡기지 않고 낭관(전랑)에게 맡겼다. ...
3공 6경의 벼슬이 비록 높더라도 조금이라도 떳떳지 않은 일이 있으면, 전랑이 3사의 여러 관리에게 논박하게 하였다.


ㄴ. 북인-남인: 기축옥사(정여립 모반사건) 당시 정철의 동인 탄압 / 건저의 사건 이후 정철 처리문제로 분열
//* 건저의 사건
정철이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자고 건의하여 신성군 세력이 반발함
정철에 대한 처리를 놓고 동인은 정철에 대한 강경론을 주장하는 북인과
온건한 입장을 주장하는 남인으로 분화되었다.
*//


ㄷ. 대북-소북: 광해군의 왕위계승 문제를 놓고 북인이 분열
ㄹ. 노론-소론: 서인 내에서 환국을 거치며 남인에 대한 처리를 놓고 분열
ㅁ. 벽파-시파: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 이에 대한 입장을 놓고 분열


- 당쟁의 발생배경 -
ㄱ. 관직 숫자의 제한: 양반의 숫자 증가에 비해 관직의 숫자는 제한되어있음
ㄴ. 문치주의 영향: 지나친 명분주의, 대간제도와 같은 관료제도, 장기간의 평화

- 평가-
ㄱ. 당파성론: 정치적으로 서로 싸우기 좋아하는 민족성으로 인해 망국의 길로 갔다는 주장
ㄴ. 붕당정치론: 학파에 근거를 둔 정파 사이에 상호 비판과 공존체제가 정착되었다고 파악

** [붕당론], 군자소인변

신은 듣기에 '붕당'이라는 말은 예부터 있었습니다. 오직 임금된 자가 군자와 소인을 분별할 수 있다면 다행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무릇 군자는 군자와 더불어 도를 함께 함으로써 무리를 만들고, 소인은 소인과 더불이 리를 같이 함으로써 무리를 이루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2) 선조(1567~1608)
- 붕당의 분화: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 / 동인의 북인 남인 분화 등 발생

- 대외관계-
ㄱ. 니탕개의 난: 함경도 북부 6진 지역에서 니탕개 등 여진족들이 반란 (서얼에게 납속허통을 일시적으로 허용하여 관직에 진출하게함)
ㄴ. 종계변무 문제 해결: 명이 [대명회전]을 중수하면서 조선 측의 해명사실을 부기함
ㄷ. 임진왜란: 일본의 침입 격퇴, 훈련도감과 속오군 설치


** 동서 붕당의 발생 / [당의통략]

후에 '김효원'이 마침내 '전랑'이 되어 많은 명망있는 사람들을 끌어들여 자기편으로 하면서 명성이 대단해졌다.
그때 '심의겸'의 동생 '심충겸'이 전랑의 후임으로 적합하다면서 추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자 김효원이 말하기를 "이조의 관원 자리가 어찌 외척들의 집안 물건이냐?"라며 저지하였다. ......


당시 김우옹, 류성룡, 허엽, 이산해, 이발, 정유길, 정지연 등이 김효원을 지지했는데, 이들은 '동인'이라고 불렸다.
김효원이 한양의 동쪽인 건청동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박순, 김계휘, 정철, 윤두수, 구사맹, 홍성민, 신응시 등은 심의겸을 지지했는데, 이들은 '서인'이라고 불렸다.
심의겸이 한양의 서쪽인 정릉방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인들은 명예와 절의를 숭상하였고, 서인들은 노련하여 몸가짐을 신중히 하는 사람이 많았다. ......
이를 '을해당론'이라고 일컫는다.



3) 광해군(1608~1623)
- 전후복구사업 추진
ㄱ. 정치: 궁궐 조성위해 공명첩 판매(종묘, 창덕궁, 창경궁, 경덕궁 등) / [동국신속삼강행실도] 편찬
ㄴ. 경제: 양안과 호적 재작성 시도(호패법 시도) / 선혜법 실시(경기도) / [동의보감] 편찬
ㄷ. 군사: 방비점검, 진법훈련, 화기도감 설치 / 에도막부와 기유약조 체결 / 명과 후금 사이에 중립외교

** 광해군의 전후 복구 사업 / [광해군일기] 1년

광해군이 또 이르기를, "우리나라는 본래 군병이 적어 각 도의 군병으로는 적을 방어하기 어렵기 때문에 '훈련도감'의 군사가 해마다 북방에 파견되는데 그 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근래 각별히 타일러서 군사의 사기를 높이고 신경을 써서 군사를 뽑아앞선 조정에서 설립한 그 본의를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경은 비변사 신료들과 상의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박홍구가 아뢰기를 "만약 군병을 등록하려면 반드시 호패를 만들어야 하고군사를 기르려면 먼저 군량을 비축하여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 대북정권-
ㄱ. 회퇴변척(1611)
  ㄱ-1. 내용: 조식의 제자였던 북인의 '정인홍'이 5현종사 중에서 회재와 퇴계를 삭제하려 하였다.
  ㄱ-2. 결과: 성균관 유생들은 정인홍을 '청금록'에서 삭제함, 북인은 사림의 지지를 상실함

//* 5현종사
: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회재 이언적, 퇴계 이황
*//

ㄴ. 정권 장악: 북인 정권에서 서인과 남인을 배제하고 폐모살제를 단행함



- 중립외교 -
ㄱ. 배경: 후금의 건국(1616) 이후 후금과 명나라의 전쟁 지속 / 명의 원군 지원 요청, 후금 세력 강성
ㄴ. 과정: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군대를 이끌고 명을 지원하게 하되, 독자적으로 대처하라고 명령함
ㄷ. '사르후 전투' 대패 직후 강홍립군이 후금에 투항하고 후금에 출병의 불가피성을 설명함

** 광해군의 중립외교 / [연려실기술]

명나라 조정에서 우리나라에 군사를 파견하기를 청하였는데 ...... 명나라 장수 '교일기'는 우리나라 군사 만여 명을 독촉하여 원수 '강홍립' 등을 거느리고 그 동쪽을 쳤다. ......
한 오랑캐(여진인)가 진 앞에 와서 연달아 통역관을 부르자, 강홍립이 곧 통역관 황연해를 시켜 나가서 응접하게 하고 말하기를,
"우리나라가 너희들과 본래 원수진 일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서로 싸우겠느냐. 지금 여기 들어온 것은 부득이한 것임을 너희 나라에서는 모르느냐."라고 하니,
드디어 적과 왕래하면서 강화를 의논하였다.



- 인조반정 -
ㄱ. 명분: 폐모살제의 불효 / 재조지은을 저버린 불충 / 과도한 토목공사 등
ㄴ. 주도: 이이 계통의 서인(김류, 이귀, 이괄 등 무인) 주도 / 이황 계통의 남인 동조
ㄷ. 과정: 광해군과 이이첨 등을 몰아내고 능양군 이종이 왕으로 즉위함
ㄹ. 결과: 서인의 정권주도 / 인조반정에 대한 명의 반발로 모문룡에 대한 지원 증가

//* 서인의 분화
공서(김류): 원당(원두표)과 낙당(김자점)으로 분화 / 효종 즉위 직후 축출됨
청서(김상헌): 한당(김육)과 산당(김집, 송시열)으로 분화
*//





4) 인조(1623~1649)
- 이괄의 난(1624) -
ㄱ. 배경: 이괄 등이 반정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킴 (2등공신에 책봉된 것에 불만)
ㄴ. 과정: 이괄의 한양 점령 및 인조의 공주 피난 등 발생 / 이후 관군에 의해 진압
ㄷ. 결과: 이괄의 잔당 등이 후금에 귀부 / 국방력의 약화 초래

** 이괄의 난 / [인조실록] 2년

어영사 '이귀'가 아뢰기를, "일이 이미 급해졌으니, 상께서는 반드시 오늘 저녁에 떠나시어 그 예봉을 피하셔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이 모두가 "남으로 공주산성에 거둥하여 형세를 보아 진퇴하는 것이 가장 좋겠다."라고 하니 남으로 옮길 계책을 정하였다. ......

적이 청석동에 우리 군사가 있는 것을 알고 '항왜' 수십 명을 시켜 밤을 틈타 놀래 달아나게 하고
산예의 평탄한 길을 거쳐 곧바로 송도를 지나 임진에 이르러 몰래 '박효립'과 통모하니
강을 지키던 군사들이 위풍을 바라보고 먼저 달아났다.
관군이 뒤쫓아 이르렀으나 적은 이미 강을 건넜다.



- 서인주도 정국 운영 -
ㄱ. 집권원칙 마련: 물실국혼, 숭용산림
ㄴ. 정권구성: 서인주도 남인참여, 산림 역할 증대(시강원에서 세자 교육)
ㄷ. 친명배금정책: 모문룡을 지원하여 호란을 초래함

- 통치체제 정비 -
: 영정법 실시 / 어영청, 총융청, 수어청 설치

** 서인 정권의 확립과 붕당론 / [묵재일기]

임금(인조)이 말씀하셨다. "무릇 정치를 행함에 있어 끼리끼리 당을 만들지 못하도록 힘써야 한다."
공(이귀)은 이에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만약 당을 없앤다는 마음을 가지시면 소인들은 그 틈을 타서 군자를 잘못된 당이라고 모함하여 일망타진할 것입니다.
주자는 '임금을 끌어들여서 같은 당원으로 삼는다.'라고 하셨습니다. 선조께서도 '이이와 성혼의 당에 들어가기를 바란다.'라고 하셨습니다. 임금은 오직 어진 사람을 얻어
믿고 맡기실 뿐입니다. 어찌 끼리끼리 만든 당이라고 해서 신하를 의심하여 소인이 들어설 단서를 열어놓으십니까?"





5) 병자호란
- 누르하치의 여진족 통일 -
ㄱ. 배경: 명의 부조 살해사건으로 받은 칙서를 바탕으로 경제적 기반(무역특권) 확립
ㄴ. 과정: 건주여진 통일(1588) / 임진왜란 과정에서 명의 견제 약화로 세력 강성
ㄷ. 결과: 국호를 '대금'(1616)이라 함, '7대한'을 앞세워 명에 선전포고함(1618)


- 정묘호란(1627) -
ㄱ. 배경: 조선의 친명배금정책과 모문룡 군대에 대한 지원으로 후금의 불만 증대
ㄴ. 침략: 광해군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하에 침략(이괄의 난 잔당이 후금에 투항)
ㄷ. 과정: 후금군 3만명이 출병하여 안주성을 함락시킴, 인조는 강화도로 피신함
ㄹ. 결과: 조선의 강화요청을 수용하여 형제관계를 맺고 조공관계를 형성함





- 병자호란의 배경 -
ㄱ. 후금(청)의 상황
>> 조선에게 과다한 세폐요구: 명과의 교역 단절 및 흉작으로 경제적으로 곤란하여 세폐규모를 점차 증대시킴
>> 군신의 맹약을 요구함: 형제관계에서 군신관계로 변경을 요구하였으며, 특히 '대청'으로 국호를 변경한 이후(1636) 요구를 강화함

ㄴ. 조선의 상황
>> 국방력 약화: 이괄의 난 이후 국방력이 약화됨 / 김자점 등 지휘관들도 군사적으로 무능했음
>> 주화론과 주전론이 대립함: 주전론이 우세하여 청의 요구를 거부함




- 병자호란의 과정 -
ㄱ. 초기상황: 청의 침입에 대해 군사적 대응에 무기력함
ㄴ. 남한산성 고립: 청의 포위 속에서 주전론과 주화론의 대립이 격화됨 / 주화론 채택
ㄷ. 정축화약: 인조가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례를 행하며 항복함



- 병자호란의 결과 -
ㄱ. 청의 요구 수용: 청에대한 군신관계 체결 / 조선의 명에대한 사대관계 단절 / 왕자와 대신 자제 등 인질 파견 / 세폐납부 / 경조사절 파견 / 명나라 공격 시 원병 파견 요구 등을 수용
ㄴ. 통치체제 동요: 여진족에 대한 굴욕적인 패배로 인해 왕조의 위신 추락 >> 북벌론 제기를 통해 통치 명분 확립



- 병자호란의 영향 -
ㄱ. 피로인 문제: 환속가 문제, 환향녀 문제 등 발생
ㄴ.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화: 청 중심의 국제질서 수립 / 일본의 독자적 화이질서 구축
>> 조선은 스스로 소중화로 여기며 주변국가와 새로운 관계를 수립함






6) 효종(1649~1659)
- 북벌 정치 -
ㄱ. 즉위직후: 김자점 등 낙당을 숙청 / 김육 등의 한당과 김집, 송시열 등의 산당을 중용함
ㄴ. 부국강병 추진
ㄴ-1. 무장중용: 이완, 유혁연 등을 군영대장으로 임명함
ㄴ-2. 병력육성: 금군을 확대하고 기병화함 / 어영청을 강화함(2만여 정병 확보)
ㄴ-3. 무기개량: 박연과 하멜 등을 통해 조총과 화포 등 신무기를 개량 및 보수함

ㄷ. 재정확보: 대동법 확대시행 / 유생에 대한 고강 / 노비추쇄 강화
ㄹ. 기해독대: 북벌 분위기 조성을 위해 송시열과 독대함
ㅁ. 결과: 군비를 확충함 >> 청의 요청으로 두 차례 나선정벌을 시도함


- 시헌력 채택 -
: 청의 역법 수용

- [농가집성] 간행
: 조선중기 농업 지침서 마련


** 효종의 북벌운동 / [송서습유]

저 오랑캐(청)는 반드시 망할 날이 있다. ......
여러 신하들이 내가 군대의 일을 하지 않기를 바라는데, 내가 굳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천시와 인사에 언제 좋은 기회가 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예포병 10만을 양성하여 자식같이 아껴서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로 만들고자 한다.
그 후에 저들에 틈이 있기를 기다려 불시에 중국으로 쳐들어가면 중원의 의사와 호걸이 어찌 호응하지 않겠는가?




7) 현종(1659~1674)
- 예송논쟁 발생-
: 기해예송(1659) >> 갑인예송(1674) 과정에서 왕권 강화


- 경신대기근 발생 -
ㄱ. 내용: 기상 이변 등의 발생으로 토지와 인구감소 심화
ㄴ. 대응: 대동법 확대(호남 산군) 및 결가 통일(12두) / 금군과 군영 소속의 군사를 축소하여 재정비함


- 북벌에 대한 논의 -
ㄱ. 공의 사의 논쟁: 대명의리론의 정립을 두고 '산당'과 '한당'이 대립함
// 산당은 사신접대 업무를 거부한 김만균을 옹호하였고, 한당은 공식적인 일에 사적인 감정을 적용하기를 꺼려함 //

ㄴ. 삼번의 난 발생: 이를 배경으로 '윤휴' 등이 북경 공략 주장(1674)

** 윤휴의 북벌운동 추진(1674) / [갑인봉사소]

병자, 정축년의 일로 말하면 하늘이 우리를 돌보지 않아 금수에게 치욕을 당한 것이었는데,
그때 인조대왕께서는 종묘사직과 만백성을 위해 한 번 죽고싶은 것도 참고 수치를 견디셨습니다. ......
임진년의 왜란으로 팔도 백성들이 도마 위에 고기 신세가 되었을 때 명 신종께서 군대를 동원하여 우리를 구출하여 편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
우리나라는 정예한 병력과 화포가 있으니 군대를 더 선발하고 무기를 갖춘 후 노련한 장수를 임명하여 북으로 '연경'을 향해 진군하면
그들을 정벌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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