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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제작문제/한국사

한국사통론 자체제작 스터디 1

by 대군장 2023. 9. 22.

1.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답안을 작성하시오. (4)

고려 중기에는 보수적인 귀족불교인 법상종이 융성하여 화엄종과 양립하였고, 따라서 선종은 제 3종단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이 때 화엄종은 고려 왕실과, 법상종은 당시 최대의 문벌귀족인 인주 이씨와 각각 연결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는데, 화엄종 측에서 의천이 등장하여 법상종을 융합하고 나아가 선종까지도 통합하려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의천은 균여의 화엄학이 실천의 문제를 떠나 지나치게 관념화 되어 있음을 비판하고, [ ]() 주장하여 화엄교단을 정비하였다. 이를 위해서 의천은 신라 화엄학의 전통을 재인식하였고, 특히 원효의 통합불교를 크게 평가하였다. 다음에는 법상종을 융합하기 위해서 [ ]의 논리를 제시하고 주로 교리면에서 법상종을 압도하여 이를 화엄종에 끌어들이려 하였다.
 
의천은 천태종을 개창하고 이를 중심으로 선종을 포섭하였다. 천태학은 고려 초기에도 교선통합에 이용된 바 있는데, 온갖 잡념을 정지하고 지혜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지관을 중시하여 그 실천 수행법이 선종의 그것과 비슷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 ]() 正宗으로 삼는 통일적이고 지적인 종파로서 왕권우위의 중앙집권적 귀족사회에 적합한 이념을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성 방법>
에 해당하는 용어를 쓸 것
에 해당하는 용어를 쓸 것
에 해당하는 경전을 쓸 것
의천의 ㉢과 중국 화엄학의 ㉢이 다른 점을 서술할 것
 

교관겸수성상겸학이다.

㉣은 법화경이다.

의천의 교선통합은 중국 화엄학에서의 교선일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천태종의 교관겸수를 채용하였다.

 

 

 

2.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답안을 작성하시오. (4)

()
에 의하여 통일된 여진은 1104년 고려에 복속하였던 여진족을 토벌하여 함흥을 아우르고 도망가는 자를 쫓아 정주관에 이르렀다.
 
()
瓘遷叅知政事判尙書刑部事兼太子賓客. 奏曰, 臣觀賊勢, 倔强難測, 宜休徒養士, 以待後日. 且臣之所以敗者, 賊騎我步, 不可敵也. 於是建議始立 , 自文武散官吏胥, 至于商賈僕隷, 及州, 凡有馬者爲神騎, 無馬者爲神步跳蕩梗弓精弩發火等軍. 年二十以上男子, 非擧子, 皆屬神步, 西班與諸鎭府軍人, 四時訓錬, 又選僧徒爲降魔軍. 遂鍊兵畜穀, 以圖再擧.
 
- 高麗史96, 列傳9 [諸臣] 尹瓘
 
()
여진은 실지를 회복하기 위하여 빈번하게 침구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 환부를 애원하였으며, 또 조정 안에서도 윤관의 공로를 시기하는 사람들이 있어 마침내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다.
 
<작성 방법>
에 해당하는 부족 명칭을 쓸 것
에 해당하는 조직을 쓸 것
() 시기의 관학 진흥책을 1가지 서술할 것
()에 해당하는 왕 재위 시기 지방정책을 1가지 서술할 것

완안부이다. 별무반이다.

() 시기는 예종시기이며 국학에 7재와 양현고를 설치하였다.

예종 시기에 지방의 속현에 감무를 파견하였다.

 

[사료해설]

윤관(尹瓘)이 참지정사 판상서형부사 겸 태자빈객으로 벼슬을 옮겼다. 그가 아뢰기를 신이 적의 기세를 보니 강성함이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니 마땅히 군사를 쉬면서 대비하여 후일을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 또 신의 패한 바는 적은 기병이고 우리는 보병이어서 가히 대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건의하여 처음으로 별무반(別武班)을 세우고 문무 산관(散官)과 이서(吏胥)로부터 상인과 노비 및 주()()()()에 이르기까지 무릇 말을 가진 자는 다 신기군(神騎軍)으로 삼았고, 말이 없는 자는 신보군(神步軍)도탕군(跳蕩軍)경궁군(梗弓軍)정노군(精弩軍)발화군(發火軍) 등에 속하게 했다. 나이 20세 이상인 남자 가운데 과거 시험을 보는 자가 아니면 다 신보군(神步軍)에 소속시키고, 서반(西班)과 모든 진()의 군인(軍人)4계절마다 훈련시키고, 또 승도(僧徒)를 뽑아 항마군(降魔軍)으로 삼았다. 마침내 군사를 훈련하며 곡식을 저축하여 다시 군대를 일으킬 것을 도모하였다.

 
 

3.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답안을 작성하시오. (4)

()
壽翰又奏, 上京地勢衰, 故天降災孽, 宮闕焚蕩, 須數御西京, 禳災集禧, 以享無窮之業. 王問諸日官, 皆曰不可. 知常安及大臣等曰, 妙淸所言, 卽聖人之法, 不可違也. ……(中略)……
國號 , 建元天開, 號其軍曰天遣忠義. 署官屬, 自兩府至州郡守, 並以西人爲之.
 
- 高麗史127, 列傳40 [叛逆1]
 
()
인종대에는 많은 농민이 유민으로 떠돌아다닐 뿐 아니라 도적으로 화하여 반항운동을 일으키기에 이르렀다.
 
<작성 방법>
에 해당하는 인물을 쓸 것
에 해당하는 국명(國名)을 쓸 것
() 시기 농민 유랑의 배경을 1가지 서술할 것
() 시기 백성 구제책을 1가지 서술할 것

묘청이다. 대위이다.

() 시기 농민 유랑의 배경은 첫째, 이자겸의 난으로 불타버린 만월대를 재건하기 위하여 큰 역사를 일으킨 것, 둘째, 태안에 굴포운하를 개착하였다가 중단한 것, 셋째, 벽골제를 수축하였다가 무당의 말을 쫓아 다시 무너뜨린 것이다.

() 시기 백성 구제첵은 다음과 같다. 첫째, 5년에 내린 유신의 교에서 권농 력전으로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히하고, 정해진 세조 이외의 횡렴을 금하며 관리들의 침탈을 금지한 것, 둘째, 9년에 동서대비원과 제위보를 갱신하여 백성들의 어려움을 구제한 것이다.

 

[사료해설]

묘청과 백수한이 또 왕에게 아뢰기를 개경의 지세(地勢)가 쇠퇴하였으므로 하늘이 재앙을 내려 궁궐이 모두 타 버렸으니 자주 서경으로 행차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맞이하여 무궁한 큰 업적을 이룩하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여러 일관(日官)에게 물으니 모두 다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정지상, 김안 그리고 몇 명의 대신이 말하기를 묘청이 말하는 것은 즉 성인의 법이니 어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국호를 대위(大爲)라 하고 연호는 천개(天開)라 하였으며 그 군대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 하였다. 그리고 관속을 배치하였는데 양부(兩府)에서 각 주군의 수령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경 사람으로 임명하였다.

 

 

4.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답안을 작성하시오. (4)

()
王纔入院門, 群臣將退, 高等殺林宗植李復基韓賴. 凡扈從文官及大小臣僚宦寺, 皆遇害. 又殺在京文臣五十餘人, 鄭仲夫等, 以王還宮.
(중략)
己卯, 王單騎遜于巨濟縣, 放太子于珍島縣. 是日, 仲夫義方高等領兵, 王弟翼陽公晧, 卽位.
 
- 高麗史19, 世家19 毅宗 248
()
38월 경진(庚辰)에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 간의대부(諫議大夫) 이 동계(東界)에서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을 치고, 전왕(前王)을 복위(復位)시키고자 했다. 동북면지병마사(東北面知兵馬事) 한언국(韓彦國)이 군사를 일으켜 여기에 호응하였다. 은 장순석(張純錫) 등을 거제(巨濟)로 보내 전왕(前王)을 받들고 계림(鷄林)에 나와 살도록 하였다.
(9) 계묘일에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에서 등을 잡아 개경으로 보내 왔다. 이의방이 그들을 저자거리[]에서 죽였으며 모든 문관을 다 살육하였다.
 
- 고려사19, 세가19 38월 경진
 
<작성 방법>
에 해당하는 인물의 묘호를 쓸 것
에 해당하는 인물명을 쓸 것
() 사건 직후 공식적인 정부기구와 실질적인 정부 기구의 운영상황을 서술할 것

명종이다. 김보당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36부의 공식적인 정부기구는 그대로 존속하였으나 형식적인 존재로 남아있었다. 무신란 직후 실질적인 정부 기구의 역할을 한 것은 종래 무신들의 최고회의기관인 중방이었다.

 

[사료해설]

왕이 보현원 문에 들고 군신(群臣)이 물러날 무렵에 이고 등이 임종식(林宗植, ?~1170)이복기(李復基,?~1170)한뢰(韓賴) 등을 죽였다. 국왕을 호종(扈從)한 문관과 대소 신료 및 환관이 모두 해를 입었다. 또 개경에 있는 문신 50여 명을 죽인 후, 정중부(鄭仲夫, 1106~1179) 등이 왕을 환궁(還宮)시켰다.

기묘일에 왕은 홀로 거제현(巨濟縣)으로 쫓겨났으며 태자는 진도현(珍島縣)으로 추방되었다. 이날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왕의 아우인 익양공(翼陽公) 왕호(王晧)를 맞아다가 왕위에 앉혔다. 그 후 명종(明宗) 3(1173) 8월에 김보당(金甫當)이 사람을 시켜 왕을 경주에 나와 살게 하였는데, 10월 경신일에 이의민(李義旼. ?~1196)이 곤원사(坤元寺)의 북쪽 연못가에서 왕을 죽였다.

 
 
 
 

 

5. 다음 자료를 읽고 <작성 방법>에 따라 답안을 작성하시오. (4)
()
이 최충수(崔忠粹)와 함께 봉사(封事)를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엎드려 보건대 적신 은 성품이 사납고 잔인하여 윗사람을 업신여기고 아랫사람을 능멸하여 신기(神器)를 흔들려고 했으므로 재앙의 불길이 성하여 백성이 살 수 없었습니다. 신 등이 폐하의 위령을 힘입어 단번에 쓸어버렸으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낡은 것을 개혁하고 새로운 정치를 도모하심에 태조의 바른 법을 한결같이 따르셔서 중흥의 길을 빛나게 여시기 바랍니다. 이에 삼가 열 가지 일을 조목으로서 아뢰나이다. (하략)
- 고려사129, 열전42 [반역3]
 
()
가장 대대적인 민란은 1193년 경상도 일대의 남적이었다. 김사미는 운문에서, 효심은 초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로 연합하여 그 세력이 경상도 전역에 확장되었으나, 이듬해 전투에서 정부군에게 패하여 7천명이나 죽임을 당하고 마침내 진압되었다.
()
경상도 일대의 민란은 1202(신종 5), 경주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민란으로 확대되었으니, 이 때 경주민들은 을 내세우고 운문과 초전의 반란군과 합세하여 그 기세가 자뭇 강성하였으나 최충헌의 과감한 토벌로 이듬해 평정되었다.
 
<작성 방법>
에 해당하는 인물을 쓸 것
에 해당하는 인물을 쓸 것
에 해당하는 지역을 쓸 것
에 해당하는 내용을 서술할 것

최충헌이다.

이의민이다.

밀성’(지금의 밀양)이다.

신라의 부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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