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사/서양사개론

3편6장4절 / 3. 서임권문제

by 대군장 2022. 3. 17.

3편 중세유럽세계의 성립과 봉건사회

6장 중세봉건사회와 교회

4절 중세교회의 발전과 서임권문제

3. 서임권문제

-----------------------------------------------------------

<국왕의 성직자임명, 서임권 장악>

// 9~10세기 혼란속에서

// 성직자들은 강력한 국왕을 기대하고

// 그에게 의지하려함

// 이러한 상황을 국왕들이 이용함

 

<왕권신정론(royal theocracy)>---------

// 교황의 무력으로인해 성직자들은

// "국왕은 지상에서 신의 목자"라고 주장

→ 국왕의 세속서임은 권리남용이 아니라

→ 당연한 권리행사로 인식됨

 

<11세기의 국왕들>---------------------

* 주교를 지명하고 서임까지 거행함

 

* 교회 개혁자들의 대응

// 세속 서임권에 도전

// 왕권에 대한 도전을 의미하기도 함

 

<교황의 대응>------------------------

 

* 로마 종교회의 (1059)

// 교황 니콜라스 2세 주최

 

// 교황선출에서 로마귀족 붕당과

// 독일 황제의 개입을 배제하고

// 로마교회 추기경에 의한 선출을 규정함

 

* 알렉산더 2세(1061~1073)

// 위 규정에 따라 처음 선출됨

// 많은 개혁 수행

// 교황권 전 유럽에 확대

// 교황사절이 도처에서 지방종교회의 개최

→ 개혁 추진

 

* 그레고리우스 7세(1073~1080)

// 클루니 수도원 출신

// 본명 힐데브란트

 

// [서임권문제]로 독일황제 [하인리히 4세]와 충돌

→ (1) '밀라노의 주교선출'에 대하여

→ 하인리히 4세에게 간섭하지 말라고 서한보냄

 

→ (2) 주교, 수도원장은

→ 세속군주에게 임명받지 말 것 규정(1075)

 

→ (3) '교황권에 관한 규정'(Dictatus papae) 마련

→ 교황에게 황제 폐위 권한 있다고 선언

 

<하인리히 4세와 그레고리우스 7세의 충돌>------

1.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조치

// 상기하였음

 

2. 하인리히 4세의 대응

// 처음에는 국내 반란으로인해 타협적

// 반란 진압후

→ 밀라노의 황제파 주교 후원 시작

 

3. 교황의 파문, 폐위 위협

 

4. 하인리히 4세의 대응

// 독일내 주교회의 소집

// 그레고리우스 7세를 찬탈자로 규정

 

5. 교황의 하인리히 4세 파문, 폐위 선언

 

6. 독일 국내의 동요

// 제후들의 반황제 움직임 표면화

// 황제 지지파 주교들도 당혹

 

7. 아우크스부르크 국회에서 합의하기로 결정

// 1077년

// 교황 주재

// 귀족과 주교로 구성

 

8. 카노사의 굴욕

// 1076년 말 교황은 국회 참석하기 위해 북상

// 하인리히와 '카노사'에서 마주침

// 하인리히는 교황에게 용서를 빔

 

9.  독일 3년간의 내란상태 지속

// 하인리히 4세는 자파세력 구축

// 반황제파는 따로 황제 후보자 옹립

 

10. 내란종식과 하인리히 4세의 반격

// 하인리히 4세, 1080년 반대파에 승리

// 교황에 대한 공세 시작, 이탈리아 진출

// 로마에서 허수아비 교황 세우고 대관식 거행

 

11. 그레고리우스 7세 피신

// '노르만'의 보호를 받음

// 수개월 후 사망

 

 

 

<이후의 서임권문제 해결 노력>-----------------

* 우르바누스 2세 (1088~1099)

// 서임권 문제 포함한

// 그레고리우스 7세의 개혁안 추진

 

* 영국

// 켄터베리 대주교 성 안셀모

→ 개혁시도

→ 해결하지 못하고 12세기 돌입

 

<영국에서의 서임권문제 해결>-------------------

* 교회와 국왕의 타협안 마련(1107)

// 교황 파스칼 2세(1099~1118) 시기

// 성 안셀모-국왕 헨리 1세 사이 타협안 마련

 

→ (1) 주교는 교회 내에서 선출하되

→ 주교로 취임하기 전에 그는 국왕에게

→ 봉신으로서 신서를 하고, 국왕으로부터

→ 봉토와 그 관할권을 수여받는다.

 

→ (2) 국왕은 신서를 거부할 수 있고

→ 주교선출에도 강한 발언권 행사가 가능하다.

 

→ 거의 같은시기에 프랑스도 비슷한 타협 성립

 

 

<독일에서의 서임권문제 해결>------------------

* 하인리히 5세(1106~1125)

// 로마점령

// 대관식 사전준비로 교황에게

// 서임권문제 해결 강요

 

* 파스칼 2세

// 영국, 프랑스에서의 타협에 불만족

// 더욱 철저한 개혁안 제시

 

// 세속군주가 주교서임권을 요구하는 것은

// 주교가 봉토와 그 관할권을

// 보유하기 때문이라 판단

 

// 따라서 이를 포기한다면

// 세속군주의 요구근거 사라질 것이라 판단

 

주교들이 봉토를 포기하고

오직 영적세계 관장에만 전념할 것을 제안

 

→ 핵심을 찌른 것이지만 비현실적

→ 추기경, 주교, 교회 내 반대 컸음

 

 

* 보름스협약(1122)

// 칼릭스투스(1119~1124)와

// 하인리히 5세 사이에 체결

// 서임권문제 일단락

 

→ 영국, 프랑스의 타협안과 유사

 

→ 독일에서는 

→ 국왕이 주교선출에 직접 참석할 권리를

→ 보유한다는 점이 첨가됨

→ 주교선출의 기준이 강화됨

 

 

 

<교황권의 강화>----------------------------------

* 교황이 그리스도교 세계 최고권력자임이 인정됨

 

* 12세기 초 통일적인 교회법전 없었음

* 지방교회 전체에 대한 정보망도 없었음

 

* 개혁적인 교황의 대응

// 교황사절을 이용

// 주교, 대주교의 로마방문 권장

→ 그들로부터 필요한 정보획득, 그러나 불충분

 

* 12세기 이후 교황의 상황

// 중앙집권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 기구와 법 마련할 필요가 있었음

// 이제 그렇게 할 수 있는 지위에 오른것

 

 

<서임권문제 투쟁의 결과>--------------------

// (1) 교회와 국가의 지속적인 대립과 긴장이라는

// 중세정치의 한 특성인 이원성을 강하게 부각시킴

 

// (2) 교회, 국가 내에서도 지배자에 대한 반항권을

// 내세우는 경향을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옴

→ 영국, 프랑스의 경우 당장은 문제되지 않았음

→ 프랑스왕은 너무 미약했고

→ 영국왕은 매우 강력했기 때문

→ 독일이 해당됨

 

 

* 독일에서 지배자에 대한 반항권 내세우는 경향 증가

// 서임권 문제 발생무렵

→ 하인리히 4세는

→ 지방제후들을 누르고

→ 강력한 왕권을 수립할 찰나에 있었음

 

// 서임권문제의 발생으로

→ 독일 지방제후에게 왕권에 대항하는 기회를 줌

→ 독일에서 강력한 왕권수립 좌절

 

// 지방할거주의 강화

→ 하인리히 5세 아들없이 사망

→ 지방제후들은 무력한 작센공을 왕으로 선출

→ 왕권 잠식

 

// 영주제 강화

→ 영주들이 소농을 압박하여 농노화

 

// 봉건제의 전국 확산

→ 지방제후들은

→ 종전의 주백의 권한(countship)과

→ 재판권을 장악하고,

→ 소영주들을 그들의 봉신으로 만듦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