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사/서양사개론

5편10장5절 / 9. 18세기의 생활

by 대군장 2022. 7. 2.

5편 근대사회의 성립

10장 절대왕정시대

5절 17~18세기의 문화

9. 18세기의 생활
----------------------------------------
18세기의 가족과 혼인 풍조
>> 3대에 걸친 대가족이 드물어짐
>> 부모와 자녀의 핵가족이 일반화됨
>> 혼인도 만혼이 많고 미혼 남녀도 상당수에 달함

* 만혼풍조의 원인
>> 경제적 요인의 탓인 경우가 대부분
>> 혼인에 대한 규제탓도 있었음

//* 혼인을 하려면 법적 승인이나
지방영주 내지 지주의 허가가
필요한 경우가 있었으며,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는 실질적으로
가난한 남여의 결혼은 어려웠다.

빈민의 자유결혼은 빈민을 증가시키고,
기아의 증가와 복지비용의 증대를 의미하였기 때문이다. *//


남자와 여자의 결혼전 생활
>> 많은 남여가 분가해서 독립할 때까지 가족안에서 노동에 종사함
>> 남자아이는 농경에 종사함
>> 여자아이는 옷감짜기와 가축을 돌보는 일에 종사함
>> 또다른 젊은 남녀는 다른 곳에서 일하러 집을 떠남

* 도시의 소년들
>> 도제가 되어 7~14년간 고된 일에 종사하며 직업과 기술을 배움
>> 운이 좋은 자만이 길드의 회원이 되어 경제적으로 자립 가능
>> 대부분의 경우 직업을 자주 바꿈
>> 소농에 고용되거나, 도로 공사의 인부가 되거나, 도시에서 물 운반에 종사
>> 경기변동의 영향을 쉽게 받았고, 실직의 위험성이 높았음

* 소녀들
>> 어린나이에 많이 농촌을 떠남
>> 직업 선택의 폭이 좁았고, 대부분이 하녀가 되었음
>> 여주인의 가혹행위와 일상적인 노동에 시달림
>> 남자 주인, 그 아들, 그의 친구로부터 성폭행을 당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음
>> 임신이라도 하게되면 그 집에서 추방되어 매춘과 절도를 일삼게되었음


혼전성교
>> 만혼인 탓으로 혼전성교가 많았음

* 영국 한 촌락의 사례
>> 첫 아이의 1/3은 혼인 전에 임신
>> 많은 아이가 혼인 후 3개월만에 태어남

* 사생아
>> 혼전성교가 많았음에도 1750년까지는 사생아가 매우 적었음

//* 영국의 어느 교구 기록에 의하면
20명의 신생아 중 사생아는 1명뿐이었고,
17세기 프랑스의 경우 사생아는 신생아의 1% 이하였다. *//

* 혼전성교의 다발과 극히 적은 사생아의 의미
>> 전산업화 시대의 유럽 농촌에서
>> 아직도 전통적인 공동체적 규제와 통제가
>>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18세기 후반에 만혼과 드문 사생화에 변화가 일어남

* 원인
1. 가내공업의 융성으로 약간이나마 경제적 여유가 생김
2. 젊은 남녀 사이에 혼인의 전제로 경제적 고려보다
사랑을 중시하는 기풍이 생김


* 사생아의 급증
>> 1750년부터 1850년에 걸쳐 사생아가 급증함

//* 프랑크푸르트의 경우
18세기 초에 신생아의 약 2%였던 사생아가
1760년에 약 5%, 1800년에는 약 10%,
그리고 1850년에는 절정에 이르러 25%로 증가함

소읍이나 촌락의 경우
사생아는 적은편이었으나
1750년에 1~3%였던 것이
1850년에는 10~20%로 증가하고 있다. *//


* 사생아 급증의 원인
>> 이 시기의 대부분의 젊은 여자들은 하녀거나 직조공이었음
>> 병사, 일용노동자 또는 남자 하인과 혼인약속을 하고서도
>> 쌍방의 임금이 적고 벌이가 신통치 않아
>> 혼인약속을 이행할 수 없는 데서 연유한 것 같음


* 혼인과 가족형태의 변화
>> 저임금과 생활불안정으로
>> 젊은 남녀 노동자들의 사랑의 꿈은 자주 깨어졌고,
>> 과거의 혼인이나 가족형태가 서민사이에서 붕괴함

>> 19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보다 더 안정된 형태가 다시 잡히게됨


18세기 유모업의 성행
* 빈민층, 농촌의 여성
>> 일반적으로 아이를 모유로 키움

* 귀족이나 중상층의 여성
>> 유모를 고용함

* 도시 소상점주, 수공업자의 처
>> 시골출신 유모를 고용함


* 유모의 폐단
1. 유모의 나쁜 특성이 유아에게 전달됨

2. 애정이 없고 돈벌이를 위한 일이었기에
탐욕스러운 유모에 맡겨진 아이는 죽기십상이었음

//* 아이가 죽으면 또 새로운 아이에게 젖을 먹이고
돈을 벌 수 있었으므로, '살인유모'(killing nurse)라는 말이 생김
수효도 적지 않았음 *//


■ 유아살해
1. 유모에 의한 의도적이거나 그렇지 않은 유아살해
2. 친 부모에 의한 원하지 않았던 살해도 적지 않았음

//* 부모 침대에 동침하던 유아를 덮쳐서 질식사 시키는 것.
부모들은 술에 취한 실수였다고 변명함 *//

* 부모에 의한 유아살해 대응
>> 1784년 오스트리아에서는
>> 5세 이하의 어린 아이를 부모가 같은 침대에 동침시키는 것을 금지함

//* 가난이 빚은 비극 *//




유아살해보다는 신생아를 버리는 경우가 훨씬 많았음


*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입구
>> 버려지는 갓난 아이의 수가 너무 많아
>> 그곳 신부는 따로 양육원을 지음


* 영국정부
>> 진정에 따라 기아를 보존하기 위한 시설을 마련함


* 양육원
>> 18세기에 이러한 양육원 많았음
>> 그 중 유명한 것이 상크트 페테르스부르크의 양육원이었음


* 상크트 페테르스부르크의 양육원
>> 19세기 초에 25,000명의 기아가 수용되고 있었음
>> 1년에 5,000명씩 수용하였음


* 그 외의 생활수준을 보여주는 자료
>> 1770년대 파리 신생아의 1/3이 기아 양육원에 수용됨
>> 그 중 1/3이 결혼한 부부의 아이였음
>> 당시 빈곤한 노동자들의 생활수준을 짐작하게 함


* 양육원에 수용된 아이들
>> 잘해야 절반이 1년 내에 사망함
>> 최악의 경우 90%가 1년 이내에 사망함
>> 따라서 기아양육원을 가리켜 '합법적인 유아살해'라고 부르기도 하였음




18세기의 높은 유아사망률

* 낮은 사회적 관심
>> 18세기의 어린 아이에 대하여
>> 부모나 사회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음
>> 부잣집 아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음


* 유아사망률
>> 5명중 1명은 사망함
>> 빈민지역의 경우 3명에 1명 꼴이었음


* 전산업화 시대의 유럽의 부모
>> 그들의 아이들 중 절반이 무사히 성장하면 매우 다행인 수준


* 에드워드 기본(Edward Gibbon, 1737~1794)
>> [로마 흥망사]로 유명한 역사가

>> 기본의 아버지는 그의 아들 중 하나라도 성장했으면 하는 뜻에서
>> 아들들의 이름을 전부 에드워드로 지었음

>> 그의 희망은 적중하여
>> 역사가이며 장남인 에드워드만이 살아남고,
>> 그의 다섯 동생과 누이 동생은 전부 어려서 죽었다.


* 18세기 말 유럽의 평균수명 35세
>> 높은 유아사망률이 한 원인이었음


* 어린아이 양육에 대한 사회, 문화의 변화
>> 무관심, 매질, 체벌 등 가혹행위가 변화한 것은
>> 18세기 말 장 자크 루소를 비롯한 계몽사상가들의 영향으로
>> 말미암은 것이었다.



자녀교육
*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의 자제교육을 위한 특수학교
>> 16세기에 설립되기 시작함


* 일반대중의 자제교육을 위한 학교(little school)
>> 17세기에 등장함


* 학교의 교육과정
>> 7~12세에 이르는 아동을 수용함
>> 기본적인 글읽기, 글쓰기, 종교교육을 실시함


* 일반대중의 다수
>> 18세기에도 무교육상태였음


* 초등교육을 위한 학교가 증가함
>> 국가적으로(프로이센) 또는 교회에 의한 것


* 계몽사상의 영향
>> 교육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킴


* 18세기 문자해독률의 상승으로 이어짐
//* 1600년에 프랑스, 스코틀랜드에서  6명의 남자 중 1명이,
영국에서는 4명 중 1명이 문자를 해독하던 것이

1800년에는 스코틀랜드 남자의 90%가,
프랑스의 경우 3명 중 2명이,
영국 남자의 절반이상이 문자해독자였음

이 시기 여성 문자해독자도 증가하였으나 남자에 뒤졌음 *//



18세기 생활수준 전반적으로 향상됨
>> 페스트와 같은 무서운 전염병이 사라짐
>> 기근도 줄어들었음

>> 1700년의 유럽인 평균수명이 25세이던 것이
1800년에는 35세로 연장된 사실이 이를 반영함


* 18세기 서민들의 주식
>> 조악하게 제분된 소맥과 라이 보리로 만든 빵

//* 프랑스 보베지의 농민은
하루에 2파운드의 빵을
물 혹은 양조된지 1년이 안되는
포도주나 맥주와 함께 먹었다. *//

>> 곡물의 공급과 빵 값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음

>> 가난한 사람들이 빵 다음으로 섭취한 것은
배추, 콩, 당근 등의 야채였음

>> 과일은 일반적인 것이 아니었음

>> 육류와 계란은 누구나 좋아했으나
빈민에게는 너무 비싸서
종교적인 축제일, 혼인식 같은 특별한 날에나
먹을 수 있었다.

>> 고기는 보통 양고기였음

>> 우유는 몸에 나쁘다고 해서 거의 마시지 않았고
치즈나 버터의 원료로 사용되었음

>> 치즈, 버터 역시 값이 비싸서
빈민들은 간혹 입수할 뿐이었음



* 귀족, 고급관리, 부유한 부르주아지의 식탁
>> 빈민과 달랐음

>> 18세기에 그들의 식탁은
육류(소, 닭, 양)와 생선류가 3접시씩 주류를 이루었음

>> 과일과 야채는 별로 섭취하지 않았음

>> 포도주를 과음하고 다식하는 경향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식탁은 건강에 좋은 편이 아니었다.



* 소상인, 장인, 하급관리들의 식탁
>> 농민의 것보다는 다양했음

>> 육류, 야채, 과일, 빵과 콩을 고루 섭취하여
건강에 좋은 편이었음


지역에 따른 식탁 내용의 차이
* 유럽 북부와 대서양 연안
>> 남부와 지중해 연안보다 잘먹었음


시기와 지역에 따른 식탁 내용의 차이
* 1700년경 영국인
>> 육류를 많이 소비함

* 1700년경 프랑스 농민
>> 빵과 야채를 많이 먹었음




18세기 새로운 식품의 추가
* 18세기 초의 식품
>> 중세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음


* 새로운 식품
>> 빈민과 아일랜드인에게 '감자'가 귀중했음


* 야채
>> 유럽의 재래산에
>> 오렌지, 레몬, 유자의 일종인 라임 등
>> 아열대산 과일이 첨가됨


* 설탕소비량 증대
>> 18세기를 통하여 설탕소비량이 증대하였음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