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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학년 선위동

남북조의 성립과 통일-1

by 대군장 2022. 11. 15.

1. 5호 16국 시대의 성립

* 성립
- 시기: 남흉노 유연의 한(전조) 건국 (304) 이래 북위의 화북 통일(439)까지 지칭
- 과정
a. 이민족의 침투: '한'의 주변 이민족 정복으로 중국 내륙 거주 이민족 증가
b. 팔왕의 난: 남흉노 유연이 '한' 건국(전조) >> 영가의 난 발생
c. 각국 자립: 흉노족(전조, 북량, 하) / 갈족(후조) / 강족(후진) / 저족(성한, 전진, 후량) / 선비족(전연, 후연, 서진, 남연, 남량) / 한족(전량, 서량, 북연)

- 흐름
: 자립 >> 전연, 전진 >> 전진의 통일 >> 북위, 후연, 후진 등 >> 북위의 통일



* 특징
- 전란지속: 경제파괴, 유민 발생, 야만적 통치로 인한 백성들의 반항 지속
- 민족융합: 상호 왕래, 교류 통해 민족 융합 촉진



* 전연(337-370)
- 모용외: 선비족 융합을 통한 세력 형성, 부여 침공(의려 자결, 동부여 건국)
- 모용황: 연왕 자칭, 도읍 용성, 고구려 환도성 함락, 부여 침공
- 이후: 도읍 '업' 이전,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370)

* 전연의 고구려 공격
- 양서, 동이열전, 고구려

강제 건원 원년에 '모용외'의 아들 '황'이 군대를 거느리고 공격하였다. '쇠'는 더불어 싸우다 크게 패하여 단신으로 말을 타고 달아났다.
'황'은 승리한 기세로 계속 추격하여 '환도'에 이르러 궁실을 불지르고 남자 5만여 구를 노략질하여 돌아왔다.



* 전진(351-394)
- 부건: '천왕대선우' 자칭, '장안'에 도읍, 국호 '대진'
- 부견
a. 화북통일: '왕맹'의 보조를 받아 화북지역 대부분 통일
b. 불교장려:  승려 '도안'을 후대 >> '구마라습' 초빙
c. 비수전투: 강남의 '동진' 정벌을 위해 나섰으나 대패(383) > 국가 와해

* 전진의 화북 통일
- 진서

'영가의 난' 이후 학교라는 말은 전혀 들어본 적이 없었으나, '부견'이 제위에 오르자 유학에 크게 관심을 갖고 '왕맹'은 민심의 안정에 노력했다.
정치에 조리가 서고 학교는 점차 융성하였다. 섬서성 일대는 완벽한 통치가 이루어지고, 사람들은 풍요로운 생활을 누렸다.
수도 '장안'에서 여러 주에 이르기까지 도로 양쪽으로 모두 회화나무와 버드나무를 가로수로 삼고, 20화리마다 정자, 40화리마다 역사를 만들어
여행자는 그곳에서 보급과 휴식을 취하고, 상인과 수공업자는 길에서 자유롭게 거래했다.
사람들은 이 태평성세를 가져온 군주를 찬양하며 노래하였다.


* 분열의 시기
- 배경: 비수의 전투(383) 이후 각 이민족들의 할거 재개
- 자립: 모용수의 '후연' / 선비족의 '북위' / 요장의 '후진'
- 통일: 북위에 의한 화북통일(439)





2. 북위의 화북통일 ---------------------------------------------
도무제(386-409)
명원제(409-423)
태무제(423-452)
문성제(452-265)
헌문제(465-471)
효문제(471-499)
선무제(499-515)
효명제(515-528)
효장제(528-530)
효무제(532-534)



* 북위의 등장
- 도무제: '대국' 부흥 >> '위'로 개칭 / '평성' 도읍, 분토정거
- 명원제:  '송'에 대한 공격, '유연'에 대한 방비 강화
- 강성배경
a. 부족제 탈피: 둔전 실시, 부락해산(분토정거) 통해 중국식 집권적 국가체제 지향
b. 호한병립: 한족의 인재 등용, 호한 구별없이 주현호적 편입
c. 군사력 강화: 선비족을 군병으로 충원(병호제), 6진 등 요충지에 군진 설치

* 평성 천도
- 위서, 태조기

'북위'는 건국한 해인 398년에 산동 6주의 백성과 관리 및 도하(선비 모용씨), 고려, 잡이 36만과 수공업 기술자 10만여 명을 '평성'으로 이주시켰다.



* 북위 태무제(423-452)
- 화북통일: 유연 물리쳐 북방 안정 / 서진, 하, 북연, 북량 병합
- 도교 국교화
a. 과정: 최호와 구겸지의 권유를 통해 도교 적극 수용, 불교 탄압
b. 의도: 이민족(선비) 출신의 북위 정권이 도교적 천명을 통해 중국 통치 정당성을 마련하려던 것
c. 내용: 평성에 천사도장 설치, 황제 즉위식에서의 부적 인수 의례 거행

* 도교 국교화
- 위서 석노지

재상 '최호'가 '구겸지'의 신법을 신기하게 여기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최호는 '태무제'에게 상소하여
"지금은 구겸지와 같은 맑은 덕을 지닌 숨은 신선이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조정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은 진실로 폐하의 다스림이 헌원씨의 황제와 똑같아서 천명에 감응한 징표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태무제가 크게 기뻐하여 구겸지를 높이고 받들어 신법을 천하에 선포하였기 때문에 '도업'이 크게 성행하였다.


- 국사필화사건
a. 배경: 태무제의 지시로 최호 등의 지식인들이 북위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석비)
b. 과정: 북위 지배층의 수치스러운 역사까지 기록 >> 북위 귀족층의 반발 확산
c. 결과: 최호 등의 최씨 일족 등 화북의 명문귀족 주살 >> 군주권의 절대성 확인
d. 영향: 한인 귀족들의 5호에 대한 모욕적 태도 변화

- 태무제 사후
: 불교가 다시 융성, 이 과정에서 성격변화(국가불교로 변화, 석굴사원 건축)

* 국사필화사건
- 자치통감

위의 주군이 '최호'에게 감비서사로 하고 고윤 등과 더불어 '국기'를 저술하도록 하고서 말하였다. "사실을 좇아서 기록하는 데 힘쓰시오." .......
저작영사인 민담, 치표는 최호에게 저술한 '국사'를 돌에 새겨서 직필을 빛내자고 권고하였다. .......
최호는 마침내 민담, 치표의 의견을 수용하여 돌을 깎아 교단의 동쪽에 세웠는데, 사방으로 100보였고 3백만전의 경비를 사용하였다.
최호가 위의 선조들을 서술하였는데, 사적이 모두 상세하고 진실되었으며, 네거리에 늘어놓으니 오가며 보는 사람들이 모두가 그럴 것이라고 말하였다.
북쪽 출신 사람들 가운데는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 없어서 서로 더불어 최호를 황제에게 참소하여 나라의 잘못한 점을 폭로하여 드러낸다고 말하였다.



* 북위 효문제(471-499)
- 봉록제: 봉록 지급을 통해 관리들의 기강 확립 시도
- 균전제
a. 배경: 5호 16국 시대 이래 유랑민과 황무지의 증가, 대토지 사유화의 경향 확대
b. 목적: 농업생산력 회복과 징세원 회복
c. 원칙
>> 지급: 15-70세 성인에게 '노전' '마전' 등을 지급, 원택지 지급
>> 기득권 인정: 노비와 경우(밭가는 소)의 수에 따라서도 토지 지급
>> 반환: 70세가 되거나 사망 시 국가에 반환
d. 결과: 국가의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 확립, 농민생활 안정, 개간지 증가


- 삼장제
a. 배경: 균전제 실시를 위해 전국적 토지소유 현황과 '호적' 작성 필요성 증대
b. 편제: 5가를 1린, 5린을 1리, 5리를 1당으로 편제
c. 업무: 호구 누락자 조사, 조세와 요역의 징발 협조, 치안 유지 책임
d. 세역: 부부는 매년 속 2석, 백 1필, 포 1필 납부, 정남의 요역 노동

* 삼장제의 시행
- 위서

'삼장'이라는 것은 다섯 집을 1린으로 해서 린장을 두고, 5린을 1리로 해서 리장을 두며, 5리를 1당으로 해서 당장을 두는 것이다.
이때는 큰 난리가 있었던 후로 백성들은 호족들의 호적에 올랐기에 모두 '호적'이 없었다.
삼장제의 목적은 호적을 깨끗이 정리하는 데 있었다. 사람 수를 헤아려서 밭을 주게 하였다.
그러므로 '균전제'는 비록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하더라도 '삼장제'가 시행된 후에 밭을 주게 되었다.


- 낙양천도
>> 천도: 평성에서 낙양으로 천도
>> 목적: 선비족 통제에 따른 황제권 강화, 한족의 문화 수용

* 낙양천도
- 위서, 고조기

"우리 선비족은 북쪽에서 일어나 '평성'에 옮겨와 살고 있소, 평성은 무력을 사용하기에는 알맞지만
문화의 덕으로 정치할 수 있는 곳이 아니오. 강남과 대치하여 북방을 굳게 지키고 안정된 정치를 하려면 중원의 힘을 빌려야 하오.
그래서 짐은 남진하여 '낙양'으로 천도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데 대신들의 의견은 어떻소?



- 한화정책
a. 서교제천의 폐지: 부락 연합적 성격을 띤 제사 폐지
b. 호한 병립: 호한통혼 / 호성의 한성화 / 호속 호어 금지 / 한어 강제
c. 성족분정령
>> 의도: 선비족과 한인귀족을 동격으로 위치시키기 위함(선비8성=한족4성)
>> 결과: 선비족을 상하층으로 분리함, 황제권이 강화됨

* 한화정책의 모습들

효문제가 말하기를 "이제 북방의 언어를 쓰지 못하게 하고, 오로지 올바른 중원의 언어만 사용하도록 하려 한다. ......
현재 조정에 있는 서른 살 이하의 사람은 예전처럼 말해서는 안된다. 만약 고의로 북방의 언어를 쓴다면,
마땅히 작위를 낮추고 관계에서 내칠 것이다. .......
점차 올바른 언어에 익숙해지면 풍속이 새롭게 교화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 구품관인법 확대
: 중정관이 중앙관의 임명도 취급하도록 개정( 5호국가 시절에는 중정관이 지방관만 임명하였다.)

* 관롱집단의 형성

'관롱집단'이란 북주에서 수, 당까지 관중지방 출신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을 일컫는다.
북주-수-당초의 황실 및 창업 공신들은 관롱 집단의 핵심인 '팔주국'의 후예들이었다.
이들은 호한 합작의 새로운 정치집단이라고 할 수 있다.


* 북위의 분열
- 반란의 발생
a. 6진의 반란(523)
>> 배경: 효문제 사후 문벌주의, 한화주의 정책에 대한 반발, 군진에 대한 천대
>> 과정: 옥야진 반란 이후 주변 군진 확산(파육한발릉, 두락주, 갈영 등이 주도)

b. 만사추노의 반란
: 갈영의 별부인 만사추노가 섬서방면에서 반란

- 이주영의 진압
: 선비족 추장 이주영이 반란을 진압하며 실권 장악

- 하음의 변(528)
a.발단: 영태후의 정권 장악, 환관과 폐신 중용 >> 효명제 독살, 유제 옹립
b. 내용: 이주영이 낙양 침입 후 태후와 유제 수장, 신료 학살 >> 효장제 옹립
c. 영향
>> 효장제: 북위 귀족들과 함께 이주영 살해 >>> 이주조의 낙양 침입 초래(절민제 옹립)
>> 고환: 한인 호족과 결합해 이주씨를 멸망시키고 효무제를 옹립함


- 동위, 서위 분열
>> 발단: 효무제가 장안의 우문태에게 도피함
>> 고환의 효정제 옹립, 우문태의 효무제 독살 후 문제 옹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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