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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서양사개론

5편10장4절 / 4. 청교도혁명

by 대군장 2022. 6. 21.

5편 근대사회의 성립

10장 절대왕정시대

4절 영국의 절대왕정과 혁명

4. 청교도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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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의

✔ 유럽 최후의 종교전쟁

✔ 잉글랜드 최후의 봉건적 귀족과 왕의 싸움

 

 

* 장기의회(1640~1653)

선거결과 국왕지지세력 현저하게 약화됨

 

그동안의 폐단을 일소하고,

절대왕정을 제한하는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나섬

 

① 선박세같은 부당한 과세를 폐지함

 

② 성실청(Star Chamber)과 같은

왕권의 특별법정을 해체함

 

//* [성실청]은

헨리 7세에 의하여 설치된 특별법정으로서,

그 명칭은 법정으로 사용되는 방의 천정에

별이 그려져있는 데서 유래하였다.

 

원래는 왕의 국무회의(Privy Council)의

특별위원회로서,

왕국의 각종 법정들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재판을 신속하게 진행시키기 위하여

배심원을 비롯하여 보통법의 절차를 생략하고,

피고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래도 튜더왕조기에는 재판이 빠르고,

비교적 공정하며, 비용이 덜 든다고 하여

이용자가 많았으나,

 

17세기에 이르러 

전제적인 절대왕권의 도구로 변하고

사법권의 남용 등으로

비난과 공격의 대상이 되었다. *//

 

③ 강압적인 국교회정책,

즉 고파교회(High Church) 정책을 철회함

 

//* 고파교회는

성공회를 비롯해 성공회와 일치를 이루는

루터교의 공교회주의 전통을 강조하는

신학조류이다.

 

사도적 전승에 따른 기독교의 역사적 연속성과

성사적인 신앙, 교회의 가시적 일치와

전례를 강조하였다.

 

성공회에서는 앵글로 가톨릭주의라고 하며

영국공교회, 또는 성공회 보편교회라고도 한다. *//

 

④ 3년마다 의회의 정기적인 소집을 결의함

[3년회기법](the Triennial Act)

 

⑤ 그동안의 실정의 책임을 물어

로드와 스트라포드를 규탄함

 

//* 찰스도 하는 수 없이 로드를 추방하고

(내란 발생 후 1645년에 처형됨)

 

스트라포드를 처형하였다. (1641) *//

 

 

 

* 사회적 분위기

✔ 장기의회의 개혁작업과 더불어

정치적인 각종 책자가 쏟아져 나옴

 

✔ 청교도계통 설교사의 설교가 과격해짐

 

✔ 민중이 정치에 참여할 기세를 보였으나,

아무도 내란이나 혁명을 생각하지는 않았음

 

 

* 혁명의 계기

✔ 아일랜드에서 발생한 대규모의 반란은

왕과 의회를 극단적인 대립으로 몰고가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 [아일랜드 반란]

✔ 스트라포드의 강압적인 지배와

 

✔ 영국신교도 이주자들에 대한

 가톨릭계지주들과 농민의 반항이었다.

 

✔ 이를 진압하기 위해서 군대가 필요했지만

의회는 군대를 찰스에게 맡기기를 꺼려함

 

✔ 그리하여 의회는

군대지휘권을 의회가 장악하는 법안을 통과시킴

 

✔ 또한 그동안의 실정과 의회의 불만을 종합한

[대간주](Grand Remonstrance, 1641)를 제시함

 

✔ 찰스는 더이상 참는 데 한계가 옴

 

 

* 찰스 1세의 대응

✔ 1642년 초에

함프덴을 비롯한 반왕파의 의회지도자 다섯명을

체포하려고 시도함

 

✔ 반왕파 의회지도자들은 런던시청으로 피신하고,

런던시는 그들의 인도를 거부하였다.

 

✔ 찰스는 북부로 떠나 군대를 규합하고,

의회 또한 자위책으로 군대를 모집하였다.

 

✔ 그리하여 1642년 여름이 끝날 무렵에는

내란(the Civil War)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청교도혁명](Puritan Revolution)이 시작되었다.

 

 

 

 

* 의회의 동향

✔ 처음 장기의회가 소집되었을 때는

의회의 입장을 지지하는 세력이 압도적이었다.

 

✔ 그러나 의회가 과격해질수록

중도적이거나 온건한 의원들은

의회파로부터 탈락하였다.

 

✔ 1641년 5월, 스트라포드의 규탄안은

204대 59로 가결되었으나,

 

✔ 같은 해 11월의 대간주는

159대 148이라는 근소한 차로 통과하였고,

 

✔ 내란이 시작되려는 1642년 6월에

의회에 남은 의원은 302명이었고,

 

✔ 236명은 그 대부분이 

왕에 합세하기 위하여 런던을 떠났다.

 

 

* 젠트리의 동향

✔ 이러한 하원의원의 동향은

그대로 지방의 젠트리에게도 반영되었다.

 

 

* 정치적으로 양분된 젠트리의 차이점

✔ 현저한 사회경제적 차이나 지위가

별로 없었다는 것이 현재까지의 연구결과

 

✔ 차이가 있었다면

그것은 정치나 종교문제에 관한

의견의 차이이거나,

전통적으로 국왕을 섬겨온 정서의 문제였음

 

✔ 젠트리 중 적지 않은 수가

내란이라는 극단적인 사태를 회피하기 원하고,

또한 끝끝내 중립을 지켰다.

 

✔ 그러나 어느 편엔가 가담한 경우에는

가톨릭과 국교도는 왕당파에서 압도적으로 많았고,

대부분의 청교도는 의회편이었음

 

✔ 평균적으로 의회파가 왕당파보다

10세가량 연령이 높았음

→ 찰스 1세의 전제정치를 얼마나 오래 직접

→ 체험하였는가의 차이에서 온듯

 

✔ 왕당파는 비교적 후진적인

북부와 서부에서 우세함

 

✔ 의회파는 동부와 중부, 런던을 비롯한

주요도시에서 우세하였다.

 

 

 

 

* 작위를 가진 귀족(peerge)의 동향

✔ 왕당파에 가담하는 편이 많았음

 

✔ 중립을 지키는자도 존재했음

 

✔ 소수이지만 의회파에 가담한 귀족중에는

유력한 문벌과 부유한 자도 많았다.

 

 

 

* 도시 상인층의 동향

✔ 독점상인을 비롯하여

왕권에 의존하거나 특혜를 받는 대상인은

대체로 왕당파이거나,

조심스러운 중립을 지킴

 

✔ 신대륙과의 무역이나, 식민에 관심을 갖고

독점권을 분쇄하려는 새로운 상인층은

대체로 청교도가 많았고, 의회를 지지함

 

✔ 소상인, 소규모 무역업자,

소상점주, 수공업자, 도제들은

청교도적인 기질이 강하고 의회편이었다.

 

✔ 혁명 초기 런던을 장악하고,

그 막대한 자원을 의회파에 제공한 것은

소상인, 수공업자, 반독점적인 신흥상인들이었다.

 

 

 

* 농촌의 동향

✔ 젠트리와 마찬가지로

자영농민층(요우먼리)은 양분되었음

 

✔ 빈농이나 농업노동자는

별다른 역할을 하지않음

 

✔ 도시에서도 노동에 의존하는 빈민층은

혁명과 별로 관계가 없었음

 

 

* 결론

✔ 청교도혁명은 

봉건적 귀족에게 지지된 절대왕권과

진보적 부르주아지와의 투쟁이라는

시민혁명의 도식에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님

 

✔ 계급투쟁은 더더욱 아니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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