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편 중세로부터 근대로의 이행
9장 근대사회의 태동
3절 종교개혁
4. 루터의 종교개혁
--------------------------------------------
<루터의 95개조 반박문 게시 이후>
* 교회
// 처음에는 별로 중요시하지 않음
* 독일 전역에 전파
// 독일어로 번역됨
// 인쇄술의 덕택으로 전국에 전파되어
// 큰 반응을 일으킴
* 라히프치히 공개토론(1519)
// (1) 루터 vs 에크
→ 에크(Johann Eck)
→ 이골슈타드 대학 신학교수 (Igoldstadt)
// (2) 루터의 인식변화
→ 처음에는 자신의 견해가 가톨릭 교리에
→ 크게 어긋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토론에 임함
→ 유능한 토론자인 에크의 추궁을 받게되자
→ 루터는 정통적인 교리를 인정하면서
→ 자기 입장을 옹호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음
// (3) 루터의 결심
→ 교황과 교회를 떠나야한다는 인식을 갖게됨
// (4) 루터에 대한 평가
→ "루터는 그러한 생각없이, 또는 자기 의사에 반하여
→ 기묘하게도 역사상 가장 혁명적인 인물이 되었다."
<루터의 논문발표 1520>-----------------------------
1. <독일 국민의 귀족에게 고함>
(Addres to the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 (1) 성직은 반드시 신성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
// (2) 독일귀족은 독일을 로마로부터
// 해방시키고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 접수하라
2. <교회의 바빌론 유수>
(On 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 (1) 교황과 성사제도 공격
3. <그리스도인의 자유>
(On the Freedom of a Christian Man)
// (1) 의인설을 중심으로 자신의 새로운 신앙 전개
<루터와 교황의 대립>-----------------------
* 루터의 논문발표 (1520)
* 교황칙서 불사름 (1520년 말)
// 기한부로 이단설을 철회하라는 내용
// 교황과 대립하게됨
* 황제 카알 5세의 개입
// (1) 보름스 국회 소집 (1521) - Worms
→ 군대배치, 삼엄하고 위협적인 분위기에서
→ 루터에게 견해 철회 요구
→ 루터의 황제 요구 거부
→ "나는 여기 서있다, 나는 달리 될 수 없다."
→ (Hier Stehe ich, ich kann nicht anders)
// (2) 카알 5세의 결정
→ 루터에 대한 법의 보호 박탈
* 작센 선제후의 보호를 받게됨
// 처음부터 루터에게 호의적이었음
// 국회개회 때부터 루터 신변을 염려함
→ 부하를 배치시킴
// 루터가 법의 보호를 박탈당함
→ 루터를 발트부르크성에 은신시킴 - Waltburg
// 발트부르크 성에서 1년간 머뭄
→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
* 성경번역의 의의
// (1) 루터가 자기 입장을 널리 이해시키고
// 옹호하기 위한 것
// (2) 근대독일어의 발전에 공헌함
<루터 종교개혁의 확산>----------------------
* 전국적인 국민운동, 사회운동으로 확산
* 재세례파 운동 (Anabaptist, 再洗禮派) -1521년
// (1) 루터보다 훨씬 급진적, 사회개혁 시도
// (2) 주장
→ "어렸을 때의 세례는 무의식 중에
→ 받은 것이기 때문에
→ 성년에 달하여 확고한 신앙을 가졌을 때
→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
// (3) 토마스 뮌처(Thomas Munzer, ca. 1490~1525)
→ 재세례파 지도자 중 한 사람
→ 공산적 사회건설 주장했다고 전해짐
(확실한 증거는 없음)
→ 묵시록적인 '천년왕국설' 주장
→ 최후의 심판과 신의 나라의
→ 도래가 가까워졌다고 설교
→ [농민전쟁]의 지도자로 활약
→ 체포되어 처형됨
* 재세례파의 성격
// (1) 극단적인 과격파
// (2) 여러곳에서 다양하게 나타남
// (3) 모든 기존질서에 반감
// (4) 사회 하층, 무교육자가 많았음
// (5) 도덕률폐기론(antinomianism)
→ 기존의 법이나 도덕률이 아니라
→ 각자의 양심이 바로 법과 도덕의 원천
* 재세례파의 사회건설 사례
// (1) 라이덴의 존 (John of Leiden)
→ 네덜란드 출신 재단사
→ 1535년 재세례파 집단과 함께
→ '뮌스터'(Munster)를 점령
→ 공동사회 건설 시도
→ '일부다처제'를 실시하는 등
→ 현실적 혼란만 야기하고 실패함
* 재세례파에 대한 박해
// 모든 교파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음
* 재세례파와 관련된 교파들
// (1) 케이커교도 (Quakers)
// (2) 침례교 (Baptists)
// (3) 메노파 (Mennonites)
* [제국기사의 반란] (1522년)
// (1) 인문주의자로 알려진 후텐, 지킹겐 등 중심
(Ulrich von Hutten, 1488~1523)
(Franz von Sickingen, 1481~1523)
// (2) 제국기사
→ 황제 직속의 독립적인 소영주들 이었으나
→ 봉건사회 붕괴, 영방국가 성립 과정에서
→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음
// (3) 루터의 종교개혁 지지
→ 과거의 영광된 독립적 지위를
→ 회복하려고 한 것
// (4) 영방군주들에 의하여 곧 진압됨
* [농민전쟁] (Peasant's War: Bauernkrieg)
// (1) 가장 규모도 크고 심각했던 사건
// (2) 1524년 6월, 슈바르츠발트 지방의
// 스틸링겐에서 농민폭동 발생
(Schwarzwald) (Stuhlingen)
// (3) 남부독일 일대로 확산
→ 라인란트(Rheinland)
→ 슈바펜
→ 프랑켄
→ 뒤링겐 등 (Turingen)
// (4) 농민들의 요구
→ 지역마다 약간씩 달랐음
→ [메밍겐 사람들의 12개조]
(Memmingen) (Twelve Articles)
// (5) 메밍겐 사람들의 '12개조'
→ 농노제의 폐지
→ 봉건적 부담의 경감
→ 10분의 1세 등 교회의 착취 경감, 철폐
// (6) 농민반란의 사회적 구성원
→ 빈농, 부농, 광산노동자, 도시 소시민, 빈민 등
→ 광범위하게 참가
// (7) 1525년 진압됨
→ 적절한 지도자를 얻지 못하였음
→ 지역에 따라 온건파, 과격파 간에 이해관계 상이
→ 공동전선을 결성하지 못함
→ 영방군주, 제후들의 반격으로 진압
<루터의 태도>----------------------------
* 루터
// 농민의 아들임을 자랑함
//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은 루터의 지지를 기대함
* 농민반란 적극적 반대
// 반란을 미친 개 잡듯이 때려잡으라고 권고
* 루터의 인식
// 뮌처와 같은 광신주의자, 농민전쟁과 같은
// 과격한 반란은 다 같이
// 그의 종교개혁을 파멸시키려는
// 악마의 소행이라고 생각함
* 루터의 주장
// 기존권위, 권력에 대한
// 시민적 복종이
// 그리스도교적 의무
* 루터의 태도로인한 결과
// (1) 농민전쟁 후 그의 종교개혁
→ 독일 민중을 떠나
→ 영방군주를 비롯한
→ 기존의 정치적 지배세력에게 의존하게됨
→ 후에 루터파교회를
→ 국가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됨
'서양사 > 서양사개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4편9장3절 / 6. 칼비니즘 (0) | 2022.04.21 |
---|---|
4편9장3절 / 5. 아우쿠스부르크의 종교화의 (0) | 2022.04.20 |
4편9장3절 / 3. 루터와 면죄부 (0) | 2022.04.19 |
4편9장3절 / 2. 독일의 정세 (0) | 2022.04.18 |
4편9장3절 / 1. 종교개혁이 일어난 배경 (0) | 2022.04.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