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편 근대사회의 성립
10장 절대왕정시대
2절 절대왕정기의 각국의 발전(1): 서유럽
4. 프랑스의 절대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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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 1515~1547>
* 합스부르크 왕실과의 장기간 대결
// 카토-캄브레지 조약(1559)
* 절대왕정 성립하기 시작
* 프랑스 르네상스가 꽃 피운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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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9세(1560~1574)
* 앙리3세(1574~1583)
* 앙리4세(1589~1610)
* 루이13세(1610~1643)
* 루이14세(1643~1715)
<위그노 전쟁, 1562~1598>---------------------
* 위그노
// (1) 프랑스 칼뱅계통 신교도
// (2) 지역적 분포
→ 중남부
→ 특히 알비이단파가 강했던 남서부지방에 많았음
// (3) 사회적 분포
→ 상인, 수공업자 등 신흥계층
→ 귀족 사이에도 적지않은 수
* 위그노전쟁의 양상
// (1) 신, 구교도의 대립
// (2) 귀족간의 세력다툼
// (3) 귀족과 왕권과의 대립
// (4) 왕위계승문제가 얽힘
// (5)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게 진행
// (6) 국제분쟁의 양상
→ 영국은 위그노를 지원
→ 에스파냐는 가톨릭을 원조
* 성 바르톨로메의 대학살(St. Bartholomew)
// (1) 1572년 7월 23일부터 24일 새벽
→ 마침 이 날이 성 바르톨로메의 '제일'(祭日)
→ 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지며,
→ 이 대학살은
→ 가톨릭의 강경파 지도자인 '기즈 공'과
→ 샤를 9세(1560~1574)의 섭정이었던
→ 모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의
→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 (2) 구교도의 위그노 습격
→ 위그노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 나바르(Navarre)왕 앙리의
→ 왕매와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하여
→ 파리로 몰려든 위그노들이 습격받음
// (3) 피해규모
→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 콜리니(Coligny) 제독을 비롯하여
→ 2천명이 학살되고,
→ 지방에서의 피살까지 합치면 1만명 이상
// (4) 결과
→ 전쟁 끝나지 않음
* 위그노전쟁의 강경파 기즈(Guise)공
// (1) '가톨릭동맹'(Ligue)의 지도자
// (2) 국왕 앙리3세(1574~1583)에게 살해됨
* 부르봉왕조의 성립
// (1) 가톨릭동맹
→ 앙리3세의 기즈공 살해에 대한 대응으로
→ 앙리3세를 살해함
// (2) 앙리4세(1589~1610)의 왕위계승
→ 부르봉(Bourbon)의 나바르왕 앙리
→ 왕위계승으로 전쟁 종결 서광 보이게됨
→ 문제는 앙리4세가 위그노 지도자였다는 것
* 파리의 완강한 저항
// (1) 앙리 4세의 대응
→ "파리는 성사를 행할 가치가 있다."
→ 가톨릭으로 개종(1593)
→ [낭트칙령](1598) - Edict of Nantes
* 낭트칙령(1598)
// (1) 앙리 4세의 조치
→ 위그노에게 일정한 지역에서의
→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
// (2) 위그노전쟁 종결
* 베르벵 조약(Vervins)
// 앙리4세와 에스파냐 사이에 체결
// 에스파냐의 간섭을 종식시킴
// 그동안 에스파냐가 점령했던 영토 회수
* 위그노전쟁의 결과와 의의
// (1) 정치파(Politique)의 승리
→ 정치파는
→ 신, 구교의 광신적인 극단파 외에
→ 보다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 왕권 강화를 통하여 질서를 회복하고
→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 신교도인 앙리4세의 즉위와 그의 개종,
→ 낭트칙령 등 일련의 정책은
→ 이들 정치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음
// (2) 절대왕정의 전성기 돌입
→ 종교분쟁으로 한 때 헝클어졌던 절대왕정은
→ 앙리4세 이후 다시 발전의 길에 올라
→ 17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앙리 4세, 1589~1610>------------------
* 쉴리(Sully, 1559~1641)
// 쉴리와 같은 유능한 보좌관 얻음
* 내정
// 농업장려
// 도로와 교량 개축, 신설
// 파리의 사치품공업, 견직물공업 육성함
* 국민의 평가 좋았음
// 그러나 광신자에게 암살당함
<루이 13세, 1610~1643>-------------------
* 왕권이 흔들림, 혼란의 징조 발생
* 삼부회 소집(1614)
// (1) 귀족의 요청으로 소집
// (2) 제 3신분(시민계급대표)과
// 귀족의 날카로운 의견대립
// (3) 왕권에 의하여 해산됨
→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1789년까지
→ 삼부회는 소집되지 않았다.
→ R. Mousnier는 이 삼부회에서의
→ 귀족과 제 3신분의 대립,
→ 그리고 왕권의 개입과 해산 등에
→ 절대왕정의 기본적인 성격의
→ 한 표현을 보려고 하였다.
*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
// (1) 이전경력
→ 삼부회에 성직자대표로 참여
→ 후에 추기경이 됨
→ 재상으로서 국정을 담당하게되자
→ 혼란은 사라지고
→ 왕권은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됨
// (2) 리슐리외의 궁극적 목표
→ 왕권의 강화와 국력의 증진
// (3) 국가이성(reason of state)
→ 모든 것을 국가의 존립과
→ 팽창이 필요로 하는 욕구에 종속시킴
// (4) 재상으로서 했던 일
→ ① 낭트칙령으로 남서부지방의 요새도시를
→ 관리할 권리가 주어졌던
→ 위그노의 정치적 특권을 없애고,
→ 그들의 본거지인
→ '라 로셸'(La Rochelle)항을 점령함
→ ② 대귀족의 궁정음모와 지방귀족의 반항,
→ 중세에 허덕이던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함
→ ③ 국왕에 의하여 임명되는
→ 지방장관(intendant)을
→ 새로이 전국에 파견하여
→ 사법, 치안유지, 재무 등
→ 지방행정을 관장하게함
→ ④ 중앙의 '국무회의'를 강화하여 전문화함
→ ⑤ 대외적으로는 30년전쟁에 개입하여
→ 독일의 신교도를 지원함으로써
→ 프랑스의 국익을 증진시키는데 성공함
* 지방장관(intendant)과 같은 신관료체제 창설
// (1) 반드시 구관료체계의 배제,
// 소멸을 뜻하진 않음
// (2) 구관료체계의 핵심
→ ① 파리 및 지방 고등법원을 비롯한
→ 각종 재판기구의 법관들
→ ② 타이유(taille) 등 직접세의 배분과
→ 징수를 관장하는 재무관료들
// (3) 구관료들
→ 그들은 16세기에 거의 제도화된
→ '매관제'에 의하여 관직을 사들인
→ 관직보유자(officers)들로서
→ ① 17세기에는 '폴레트제'(paulette)에 의하여
→ 관직의 상속권이 확립되었다.
→ ② 뿐만 아니라 고등법원의 법관 등
→ 고급관리는 귀족이 될 수 있었다.
→ 이른바 '법복귀족', 내지 '관직귀족'이
→ 그것이다.
// (4) 관직보유자의 경우
→ 관직은 양도, 상속, 매매가 가능한
→ 일종의 가산으로서,
→ 봉급보다는 직무수행으로 들어오는
→ 수입이 더 컸고,
→ 따라서 관직은 이권이기도 하였다.
→ 이러한 관직보유자집단이 비능률적이며,
→ 절대왕권과 경우에 따라
→ 대립적인 관계에 서게되는 것도
→ 당연한 일이었다.
// (5) 신관료체계 창설의 의미
→ 기존의 관직보유자와 별개로
→ 국가가 지불하는 봉급에 의존하고,
→ 자유롭계 임면할 수 있으며,
→ 지휘명령계통에 일관성이 있는
→ 신관료체계의 창설은
→ 절대왕권강화의 길이기도 하였다.
→ 그러나 구관료체계가 소멸하지 않고
→ 새로운 것과 교차하면서 접목되는 현상은
→ 절대왕정기의 거의 모든면에서
→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루이14세, 1643~1715>------------------------
* 마자랭(Mazarin, 1602~1661)
// 리슐리외의 후계자
// 루이14세의 미성년기를 보좌함
// 이탈리아 출신의 추기경
// 철저한 국가이성의 추종자
* 프롱드의 난(Fronde) (1648~1653)
// (1) 원인
→ 국무회의의 강화와
→ 지방장관의 임명으로
→ 권한이 축소된 고등법원과 귀족들이 일으킴
// (2) 실패
→ 국민, 특히 신흥시민계급에게
→ 기반을 두지못하여 실패함
// (3) 영향
→ 마자랭의 권력과
→ 관료제적인 절대왕정을 강화하고
→ 확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옴
* 루이 14세의 직접통치
// (1) 마자랭의 사망(1661) 이후
→ 성년에 달한 루이14세는
→ 재상을 두지 않고 직접통치함
// (2) '태양왕'으로 불림
→ 총명하고 우아했음
→ 위대한 지배자로서의 자질을 거의 모두 갖춤
→ 스스로 '국왕의 일'이라 말한 국가통치에 전념
* 콜베르(Colbert, 1619~1683)
// (1) 시민계급 출신
// (2) 재무를 담당
// (3) 광범위하게 국정 관장
→ 재무, 상업, 농업, 해군, 식민지 등
→ 리슐리외와 같은 재상은 아니고
→ 왕의 충실한 관리
// (4) 콜베르주의(Colbertism)
→ 전형적인 중상주의정책 실시
→ ① 재정개혁에 착수
→ ② 개간, 관개시설 확충 등 농업진흥에 힘씀
→ ③ 프랑스공업의 육성에 힘씀
// (5) 프랑스 공업 육성
→ ① 국립공장과 특권매뉴팩처를 설립하고
→ 각종 특권을 부여함
→ ② 자본대여, 장려금의 하사,
→ 외국인 기술자의 유치 등
→ 모든방법을 동원하여 국내공업의
→ 육성과 보호에 힘씀
// (6) 상업의 발전을 꾀함
→ ① 수입억제와 수출증대 도모
→ ② 국내관세 정비
→ ③ 도로의 수축
→ ④ 랑그독 운하의 개통
→ ⑤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해외진출 도모
→ ⑥ 국제무역 증진, 식민지획득 도모
// (7) 콜베르의 정책, 사업에 대한 평가
→ 모든 정책, 사업이 성공한 것은 아님
→ 유럽전체로는 불황기에 접어든 17세기 후반에
→ 프랑스의 국부와 국력은 크게 증대됨
* 루이 14세 시기의 문화
// (1) 루이 14세
→ ① 국부의 증대를 바탕으로
→ 파리 교외에 '베르사유궁전' 지음
→ ②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여
→ 라신(Racine), 코르네유(Corneille),
→ 몰리에르(Moliere) 등
→ 위대한 극작가가 나와
→ 프랑스 고전문학과
→ '바로크예술'이 꽃피게 되었다.
→ ③ 루이 14세의 베르사유에서의
→ 궁정생활은 호화롭고 세련된 것이었으며,
→ 유럽 각국의 군주나 국왕들이
→ 이를 모방하려고 애쓰고,
→ 프랑스어는 유럽 외교계와 사교계의 언어가 됨
* 루이 14세의 군사력 양성
// (1) '위대한 국민'에 걸맞는
// 군사력 양성에 주력
→ 17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 유럽에서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됨
// (2) 당대 제일의 군정가
→ 루부아(Lubois, 1641~1691)
// (3) 축성술에 뛰어났던
→ 보방(Vauban, 1633~1707)
// (4) 명장
→ 튀렌(Turenne, 1611~1675)
* 루이 14세의 영토팽창 야망
// (1)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침략(1667~1668)
→ 에스파냐 왕실출신인
→ 왕비의 상속권을 내세워 침략함
// (2) 네덜란드 전쟁(1672~1678)
→ ① 다시 네덜란드를 고립시키고
→ 네덜란드를 공격함
→ ② 네덜란드는 오렌지공 윌리엄의
→ 지도 하에 완강한 저항을 보임
→ ③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프로이센이
→ 네덜란드를 지원함
→ ④ 루이 14세는 [나이메헨 조약]으로
→ '프랑슈 콩테'를 확보하고
→ 전쟁을 종결시켰다. (1678) (Nimwegen)
// (3)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1688~1697)
→ ① 라인강변의 서부독일로
→ 영토를 팽창하기 위하여 침략
→ ② 거의 유럽전체의 대동맹 결성
→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을 중심으로
→ 독일 내의 유력한 영방국가와
→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스웨덴,
→ 전쟁중에 윌리엄이 영국왕이 되었기 때문에
→ 영국도 참전
→ 사보이 등
→ ③ 프랑스해군은 영국해군에게 패배
→ ④ [라이스바이크 조약]에서 (1697)
→ 프랑스는 '알자스의 일부'를 보유하는 데 그치고
→ 현상유지에 합의하였다. (Ryswick)
// (4) '에스파냐왕위계승전쟁' (1701~1713)
→ ① 왕위계승자가 없던 에스파냐의
→ 카를로스 2세(1665~1700)가
→ 그의 전영토와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
→ 필립에게 물려주고 사망함
→ ② 만일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 부르봉왕실에 의하여 통합된다면,
→ 이는 유럽 국제정치의 '세력균형'을
→ 완전히 파괴하는 결과가 된다.
(balance of power)
→ 이 세력균형은 법적인 구속력이나
→ 도덕적인 당위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 유럽 근대의 국제질서를 유지시키는
→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그 내용은 한 국가가 지나치게 강대해진 경우
→ 그 위협을 느끼는 인접국가들이 결합하여
→ 이를 억제하는 것으로
→ 영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 ③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를 주축으로
→ 대동맹이 결성되고,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 ④ 전세는 프랑스에게 불리했으나,
→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고,
→ 대동맹의 단결도 말기에는 깨어졌다.
→ ⑤ 전쟁에 지친 루이14세는
→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화평을 맺었다.
→ (1713) (Utrecht)
* 위트레흐트 조약
// (1) 에스파냐가 프랑스와 합병하지
// 않는다는 조건 하에 루이 14세의
// 손자 필립이 에스파냐 왕이 되는 것이
// 인정된다.
// (2) 프랑스는 신대륙의
// 뉴펀들랜드, 노바스코티아 및
// 허드슨만 지역을 영국에 양도한다.
// (3) 영국은 에스파냐로부터
// 지중해의 관문격인 '지브롤터'와
// 에스파냐 식민지에 대한 노예공급권인
// 아시엔토(Asiento)를 얻었다.
// (4) 오스트리아는 지금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를 획득했다.
// (5) 사보이는 시칠리아를 얻었으나
// 1720년 이를 사르디니아와 바꾸어
// '사르디니아 왕'을 칭하게 됨으로써,
// 19세기에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긴 과정이
//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6) 프로이센도 이 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 왕의 칭호를 갖게되었다.
* 루이 14세 치세의 말기
// (1) 무모한 전쟁 거듭
→ 국력 탕진
// (2) 퐁텐블로 칙령(1685)
→ 종교적 통합을 꾀하는 뜻에서
→ '낭트칙령'을 철폐함으로써
→ 약 5만에 달하는 유능한 기술자와
→ 상공인의 위그노들이
→ 네덜란드, 영국과 그 신대륙의 식민지,
→ 그리고 프로이센 등으로 빠져나갔다.
// (3) 루이 14세 사망무렵
→ 프랑스의 영광은 기울어짐
→ 재정은 부채에 허덕이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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