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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사/서양사개론

5편10장2절 / 4. 프랑스의 절대왕정

by 대군장 2022. 4. 30.

5편 근대사회의 성립

10장 절대왕정시대

2절 절대왕정기의 각국의 발전(1): 서유럽

4. 프랑스의 절대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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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1세, 1515~1547>

* 합스부르크 왕실과의 장기간 대결

// 카토-캄브레지 조약(1559)

 

* 절대왕정 성립하기 시작

* 프랑스 르네상스가 꽃 피운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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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를9세(1560~1574)

* 앙리3세(1574~1583)

* 앙리4세(1589~1610)

* 루이13세(1610~1643)

* 루이14세(1643~1715)

 

 

 

<위그노 전쟁, 1562~1598>---------------------

* 위그노

// (1) 프랑스 칼뱅계통 신교도

// (2) 지역적 분포

→ 중남부

→ 특히 알비이단파가 강했던 남서부지방에 많았음

 

// (3) 사회적 분포

→ 상인, 수공업자 등 신흥계층

→ 귀족 사이에도 적지않은 수

 

 

* 위그노전쟁의 양상

// (1) 신, 구교도의 대립

// (2) 귀족간의 세력다툼

// (3) 귀족과 왕권과의 대립

// (4) 왕위계승문제가 얽힘

// (5) 장기간에 걸쳐 복잡하게 진행

 

// (6) 국제분쟁의 양상

→ 영국은 위그노를 지원

→ 에스파냐는 가톨릭을 원조

 

* 성 바르톨로메의 대학살(St. Bartholomew)

// (1) 1572년 7월 23일부터 24일 새벽

→ 마침 이 날이 성 바르톨로메의 '제일'(祭日)

→ 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지며,

→ 이 대학살은

→ 가톨릭의 강경파 지도자인 '기즈 공'과

→ 샤를 9세(1560~1574)의 섭정이었던

→ 모후 '카트린 드 메디치'(Catherine de Medici)의

→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한 것이었다.

 

 

// (2) 구교도의 위그노 습격

→ 위그노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 나바르(Navarre)왕 앙리의

→ 왕매와의 혼인을 축하하기 위하여

→ 파리로 몰려든 위그노들이 습격받음

 

// (3) 피해규모

→ 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던

→ 콜리니(Coligny) 제독을 비롯하여

→ 2천명이 학살되고,

→ 지방에서의 피살까지 합치면 1만명 이상

 

// (4) 결과

→ 전쟁 끝나지 않음

 

 

* 위그노전쟁의 강경파 기즈(Guise)공

// (1) '가톨릭동맹'(Ligue)의 지도자

// (2) 국왕 앙리3세(1574~1583)에게 살해됨

 

* 부르봉왕조의 성립

// (1) 가톨릭동맹

→ 앙리3세의 기즈공 살해에 대한 대응으로

→ 앙리3세를 살해함

 

// (2) 앙리4세(1589~1610)의 왕위계승

→ 부르봉(Bourbon)의 나바르왕 앙리

→ 왕위계승으로 전쟁 종결 서광 보이게됨

→ 문제는 앙리4세가 위그노 지도자였다는 것

 

* 파리의 완강한 저항

// (1) 앙리 4세의 대응

→ "파리는 성사를 행할 가치가 있다."

→ 가톨릭으로 개종(1593)

→ [낭트칙령](1598) - Edict of Nantes

 

* 낭트칙령(1598)

// (1) 앙리 4세의 조치

→ 위그노에게 일정한 지역에서의

→ 신앙의 자유를 허용함

 

// (2) 위그노전쟁 종결

 

 

* 베르벵 조약(Vervins)

// 앙리4세와 에스파냐 사이에 체결

// 에스파냐의 간섭을 종식시킴

// 그동안 에스파냐가 점령했던 영토 회수

 

 

* 위그노전쟁의 결과와 의의

// (1) 정치파(Politique)의 승리

→ 정치파는

→ 신, 구교의 광신적인 극단파 외에

→ 보다 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 왕권 강화를 통하여 질서를 회복하고

→ 유지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 신교도인 앙리4세의 즉위와 그의 개종,

→ 낭트칙령 등 일련의 정책은

→ 이들 정치파의 승리를 의미하는 것이었음

 

// (2) 절대왕정의 전성기 돌입

→ 종교분쟁으로 한 때 헝클어졌던 절대왕정은

→ 앙리4세 이후 다시 발전의 길에 올라

→ 17세기 후반에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앙리 4세, 1589~1610>------------------

* 쉴리(Sully, 1559~1641)

// 쉴리와 같은 유능한 보좌관 얻음

 

* 내정

// 농업장려

// 도로와 교량 개축, 신설

// 파리의 사치품공업, 견직물공업 육성함

 

* 국민의 평가 좋았음

// 그러나 광신자에게 암살당함

 

 

<루이 13세, 1610~1643>-------------------

* 왕권이 흔들림, 혼란의 징조 발생

 

* 삼부회 소집(1614)

// (1) 귀족의 요청으로 소집

 

// (2) 제 3신분(시민계급대표)과

// 귀족의 날카로운 의견대립

 

// (3) 왕권에 의하여 해산됨

→ 이후 프랑스 혁명이 발생한 1789년까지

→ 삼부회는 소집되지 않았다.

→ R. Mousnier는 이 삼부회에서의

→ 귀족과 제 3신분의 대립,

→ 그리고 왕권의 개입과 해산 등에

→ 절대왕정의 기본적인 성격의

→ 한 표현을 보려고 하였다.

 

 

* 리슐리외(Richelieu, 1585~1642)

// (1) 이전경력

→ 삼부회에 성직자대표로 참여

→ 후에 추기경이 됨

 

→ 재상으로서 국정을 담당하게되자

→ 혼란은 사라지고

→ 왕권은 확고한 기반을 구축하게됨

 

// (2) 리슐리외의 궁극적 목표

→ 왕권의 강화와 국력의 증진

 

// (3) 국가이성(reason of state)

→ 모든 것을 국가의 존립과

→ 팽창이 필요로 하는 욕구에 종속시킴

 

// (4) 재상으로서 했던 일

낭트칙령으로 남서부지방의 요새도시를

→ 관리할 권리가 주어졌던

→ 위그노의 정치적 특권을 없애고,

→ 그들의 본거지인

→ '라 로셸'(La Rochelle)항을 점령함

 

대귀족의 궁정음모와 지방귀족의 반항,

→ 중세에 허덕이던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함

 

국왕에 의하여 임명되는

→ 지방장관(intendant)을

→ 새로이 전국에 파견하여

→ 사법, 치안유지, 재무 등 

→ 지방행정을 관장하게함

 

중앙의 '국무회의'를 강화하여 전문화함

 

대외적으로는 30년전쟁에 개입하여

→ 독일의 신교도를 지원함으로써

→ 프랑스의 국익을 증진시키는데 성공함

 

 

* 지방장관(intendant)과 같은 신관료체제 창설

// (1) 반드시 구관료체계의 배제,

// 소멸을 뜻하진 않음

 

// (2) 구관료체계의 핵심

→ ① 파리 및 지방 고등법원을 비롯한

→ 각종 재판기구의 법관들

 

→ ② 타이유(taille) 등 직접세의 배분과

→ 징수를 관장하는 재무관료들

 

// (3) 구관료들

→ 그들은 16세기에 거의 제도화된 

→ '매관제'에 의하여 관직을 사들인

→ 관직보유자(officers)들로서

 

17세기에는 '폴레트제'(paulette)에 의하여

→ 관직의 상속권이 확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등법원의 법관 등

→ 고급관리는 귀족이 될 수 있었다.

→ 이른바 '법복귀족', 내지 '관직귀족'이

→ 그것이다.

 

// (4) 관직보유자의 경우

→ 관직은 양도, 상속, 매매가 가능한

→ 일종의 가산으로서,

→ 봉급보다는 직무수행으로 들어오는

→ 수입이 더 컸고,

→ 따라서 관직은 이권이기도 하였다.

 

→ 이러한 관직보유자집단이 비능률적이며,

→ 절대왕권과 경우에 따라

→ 대립적인 관계에 서게되는 것도

→ 당연한 일이었다.

 

// (5) 신관료체계 창설의 의미

→ 기존의 관직보유자와 별개로

→ 국가가 지불하는 봉급에 의존하고,

→ 자유롭계 임면할 수 있으며,

→ 지휘명령계통에 일관성이 있는

→ 신관료체계의 창설은

→ 절대왕권강화의 길이기도 하였다.

 

→ 그러나 구관료체계가 소멸하지 않고

→ 새로운 것과 교차하면서 접목되는 현상은

→ 절대왕정기의 거의 모든면에서

→ 볼 수 있는 특징이기도 하다.

 

 

 

 

<루이14세, 1643~1715>------------------------

* 마자랭(Mazarin, 1602~1661)

// 리슐리외의 후계자

// 루이14세의 미성년기를 보좌함

// 이탈리아 출신의 추기경

// 철저한 국가이성의 추종자

 

* 프롱드의 난(Fronde) (1648~1653)

// (1) 원인

→ 국무회의의 강화와

→ 지방장관의 임명으로

→ 권한이 축소된 고등법원과 귀족들이 일으킴

 

// (2) 실패

→ 국민, 특히 신흥시민계급에게

→ 기반을 두지못하여 실패함

 

// (3) 영향

→ 마자랭의 권력과

→ 관료제적인 절대왕정을 강화하고

→ 확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옴

 

* 루이 14세의 직접통치

// (1) 마자랭의 사망(1661) 이후 

→ 성년에 달한 루이14세는

→ 재상을 두지 않고 직접통치함

 

// (2) '태양왕'으로 불림

→ 총명하고 우아했음

→ 위대한 지배자로서의 자질을 거의 모두 갖춤

→ 스스로 '국왕의 일'이라 말한 국가통치에 전념

 

 

* 콜베르(Colbert, 1619~1683)

// (1) 시민계급 출신

// (2) 재무를 담당

 

// (3) 광범위하게 국정 관장

→ 재무, 상업, 농업, 해군, 식민지 등

→ 리슐리외와 같은 재상은 아니고

→ 왕의 충실한 관리

 

// (4) 콜베르주의(Colbertism)

→ 전형적인 중상주의정책 실시

재정개혁에 착수

개간, 관개시설 확충 등 농업진흥에 힘씀

프랑스공업의 육성에 힘씀

 

// (5) 프랑스 공업 육성

국립공장과 특권매뉴팩처를 설립하고

→ 각종 특권을 부여함

 

자본대여, 장려금의 하사,

→ 외국인 기술자의 유치 등

→ 모든방법을 동원하여 국내공업의

→ 육성과 보호에 힘씀 

 

// (6) 상업의 발전을 꾀함

수입억제와 수출증대 도모

국내관세 정비

도로의 수축

랑그독 운하의 개통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해외진출 도모

국제무역 증진, 식민지획득 도모

 

// (7) 콜베르의 정책, 사업에 대한 평가

→ 모든 정책, 사업이 성공한 것은 아님

 

→ 유럽전체로는 불황기에 접어든 17세기 후반에

→ 프랑스의 국부와 국력은 크게 증대됨

 

 

* 루이 14세 시기의 문화

// (1) 루이 14세

국부의 증대를 바탕으로

→ 파리 교외에 '베르사유궁전' 지음

 

문화와 예술을 장려하여

→ 라신(Racine), 코르네유(Corneille),

→ 몰리에르(Moliere) 등

→ 위대한 극작가가 나와

→ 프랑스 고전문학과

→ '바로크예술'이 꽃피게 되었다.

 

루이 14세의 베르사유에서의

→ 궁정생활은 호화롭고 세련된 것이었으며,

→ 유럽 각국의 군주나 국왕들이

→ 이를 모방하려고 애쓰고,

→ 프랑스어는 유럽 외교계와 사교계의 언어가 됨

 

 

* 루이 14세의 군사력 양성

// (1) '위대한 국민'에 걸맞는

// 군사력 양성에 주력

→ 17세기 후반의 프랑스는

→ 유럽에서 가장 우월한 지위를 누리게됨

 

// (2) 당대 제일의 군정가

→ 루부아(Lubois, 1641~1691)

 

// (3) 축성술에 뛰어났던

→ 보방(Vauban, 1633~1707)

 

// (4) 명장

→ 튀렌(Turenne, 1611~1675)

 

 

* 루이 14세의 영토팽창 야망

// (1) 에스파냐령 네덜란드 침략(1667~1668)

→ 에스파냐 왕실출신인

→ 왕비의 상속권을 내세워 침략함

 

// (2) 네덜란드 전쟁(1672~1678)

다시 네덜란드를 고립시키고

→ 네덜란드를 공격함

 

네덜란드는 오렌지공 윌리엄의

→ 지도 하에 완강한 저항을 보임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프로이센이

→ 네덜란드를 지원함

 

루이 14세는 [나이메헨 조약]으로

→ '프랑슈 콩테'를 확보하고

→ 전쟁을 종결시켰다. (1678) (Nimwegen)

 

// (3) 아우크스부르크동맹전쟁(1688~1697)

라인강변의 서부독일로

→ 영토를 팽창하기 위하여 침략

 

거의 유럽전체의 대동맹 결성

→ 네덜란드의 오렌지공 윌리엄을 중심으로

→ 독일 내의 유력한 영방국가와

→ 오스트리아, 에스파냐, 스웨덴,

→ 전쟁중에 윌리엄이 영국왕이 되었기 때문에

→ 영국도 참전

→ 사보이 등

 

프랑스해군은 영국해군에게 패배

 

→ ④ [라이스바이크 조약]에서 (1697)

→ 프랑스는 '알자스의 일부'를 보유하는 데 그치고

→ 현상유지에 합의하였다. (Ryswick)

 

 

// (4) '에스파냐왕위계승전쟁' (1701~1713)

→ ① 왕위계승자가 없던 에스파냐의

→ 카를로스 2세(1665~1700)가

→ 그의 전영토와 왕위를 루이 14세의 손자

→ 필립에게 물려주고 사망함

 

→ ② 만일 프랑스와 에스파냐가 

→ 부르봉왕실에 의하여 통합된다면,

→ 이는 유럽 국제정치의 '세력균형'을

→ 완전히 파괴하는 결과가 된다.

    (balance of power)

 

→ 이 세력균형은 법적인 구속력이나

→ 도덕적인 당위성을 가진 것은 아니었으나,

→ 유럽 근대의 국제질서를 유지시키는 

→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 그 내용은 한 국가가 지나치게 강대해진 경우

→ 그 위협을 느끼는 인접국가들이 결합하여

→ 이를 억제하는 것으로

→ 영국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영국, 네덜란드, 오스트리아를 주축으로

→ 대동맹이 결성되고, 격렬한 전투가 이어졌다.

 

전세는 프랑스에게 불리했으나,

→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고,

→ 대동맹의 단결도 말기에는 깨어졌다.

 

전쟁에 지친 루이14세는

→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화평을 맺었다.

→ (1713) (Utrecht)

 

 

* 위트레흐트 조약

// (1) 에스파냐가 프랑스와 합병하지

// 않는다는 조건 하에 루이 14세의

// 손자 필립이 에스파냐 왕이 되는 것이

// 인정된다.

 

// (2) 프랑스는 신대륙의

// 뉴펀들랜드, 노바스코티아 및

// 허드슨만 지역을 영국에 양도한다.

 

// (3) 영국은 에스파냐로부터

// 지중해의 관문격인 '지브롤터'와

// 에스파냐 식민지에 대한 노예공급권인

// 아시엔토(Asiento)를 얻었다.

 

// (4) 오스트리아는 지금의 벨기에에 해당하는

// 에스파냐령 네덜란드를 획득했다.

 

// (5) 사보이는 시칠리아를 얻었으나

// 1720년 이를 사르디니아와 바꾸어

// '사르디니아 왕'을 칭하게 됨으로써,

// 19세기에 이탈리아를 통일하는 긴 과정이

//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 (6) 프로이센도 이 전쟁에 참전한 공로로

// 왕의 칭호를 갖게되었다.

 

 

* 루이 14세 치세의 말기

// (1) 무모한 전쟁 거듭

→ 국력 탕진

 

// (2) 퐁텐블로 칙령(1685)

→ 종교적 통합을 꾀하는 뜻에서

→ '낭트칙령'을 철폐함으로써

→ 약 5만에 달하는 유능한 기술자와

→ 상공인의 위그노들이

→ 네덜란드, 영국과 그 신대륙의 식민지,

→ 그리고 프로이센 등으로 빠져나갔다.

 

// (3) 루이 14세 사망무렵

→ 프랑스의 영광은 기울어짐

→ 재정은 부채에 허덕이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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