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양사/서양사개론

5편11장2절 / 3. 재정위기와 귀족의 반항

by 대군장 2022. 7. 16.


5편 근대사회의 성립

11장 시민혁명과 산업혁명

2절 프랑스혁명

3. 재정위기와 귀족의 반항
----------------------------------------
왕실의 재정위기
- 프랑스혁명의 직접적인 원인 (근본적 원인은 앙시앵 레짐의 모순)

- 왕실의 재정위기를 이용하여
절대왕정에 최초의 타격을 가한 것은 귀족계급이었음


* 왕실재정
- 루이 14세 말년부터 어려운 상태에 빠짐
- 루이 15세(1713~1774) 때도 개선되지는 않았음
- 루이 16세(1774~1792)가 개혁을 시도하였음


* 루이 16세 시기 왕실재정 개혁

- 즉위 초에 유능한 지방장관, 일류급 중농주의자인
'튀르고'(Turgot, 1727~1781)를 재무장관에 임명하여
개혁을 시도함

- (튀르고의 개혁안)
비교적 온건한 것
귀족의 면세 특권을 침해하는 것
궁정경비의 삭감을 포함함
귀족과 왕비의 반대에 봉착하여 실패함


- (네케르, Necker: 1732~1894)
튀르고의 뒤를 이음
스위스 출신의 은행가
계속 돈을 빌리면서 사태를 꾸려감
미국 독립전쟁 참전으로 국가재정을 결정적으로 위기에 몰아넣음

//* 앙시앵 레짐 하의 유일한 예산 보고서인 1788년의 보고서에 따르면
세출 6억2천9백만 리브르(livre)에 대하여
세입은 5억3백만 리브르로서
적자가 1억2천6백만 리브르에 달하고 있다.

세출의 내역을 보면
궁정비용이 3천5백만 리브르로서 총 세출의 6%,
일반회계가 19%,
육해군 및 외교관계가 26%를 차지하고 있는 데 비하여
국채의 이자 및 상환이 3억1천8백만 리브르로서 총세출의 50%를 초과하고 있다.  *//



- (칼론느, Calonne, 1734~1802)
네케르의 뒤를 이어 재무장관이 됨
고식적인 방법으로는 재정위기를 타개할 수 없음을 깨닫고 다방면에 걸친 개혁안을 마련함

가장 중요한 사시른 앙시앵 레짐 하에서
모든 국민이 세금을 고르게 부담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칼론느는
모든 토지소유자로 하여금 신분의 차별이나 면세의 특권없이
일률적으로 현물로 납부하는 [보조지세]의 부과를

그의 개혁안의 핵심으로 삼았음

개혁안이 '고등법원'의 반대를 받을 것을 예상한 칼론느는
비교적 왕실에 가까운 귀족 계급의 각계대표들로 구성된
[명사회]를 소집할 것을 구상함



* 명사회(assembly of the notables)
- 14명의 고위 성직자
- 36명의 대영주
- 33명의 고등법원법관
- 13명의 지방장관과 왕실참사회원
- 37명의 지방삼부회 및 도시대표

- (1788년에 소집된 명사회)
칼론느의 제안에 반대하여 칼론느는 사임함


* 정부의 선택지
- 고등법원과 정면으로 대결하는 수밖에 없게 되었다.


* 고등법원
- 법복귀족의 아성
- 국왕의 칙령이 발효하려면 고등법원에 등록되어야 함

- 고등법원은 이에 대하여 '간주'할 권리가 있는 것을 이용하여
개혁에 완강하게 반대함

- (고등법원의 요구)
새로운 세금의 부과는 오직 '삼부회'만의 권한이라고 주장
국민의 자유와 기본권의 이름 아래, 삼부회의 소집을 강력하게 요구함

- (고등법원의 의도)
왕실 재정위기를 이용하여 과거에 상실했던 정치권력 회복
절대왕권을 제약하여 귀족정치를 실시하는 것



* 루이 14세의 결정
- 1788년 여름에 '사표를 던지는' 기분으로
다음 해 5월에 1614년 이래 소집되지 않고있던
삼부회를 소집할 것을 선포함

- 샤토브리앙의 평가 (Chateaubriand)
"귀족이 혁명을 시작하고, 평민이 이를 성취하였다."
귀족의 반항으로 시민혁명으로의 길이 열림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