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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한국사통론

조선의 건국과 집권화 정책

by 대군장 2022. 11. 1.

<(1) 군제개편과 도평의사사의 약화>

 

1. 군제개편 및 의흥삼군부의 설치

[의흥삼군부] 설치(1392): 국왕의 친위군 조직, 중앙군 병력의 핵심

[의흥친군위]를 [의흥삼군부]로 확대 개편(1393): 병권의 중앙집중 달성

 

의흥삼군부 설치의 의미

: 도평의사사의 기능을 약화시키는 조치

→ 군정이 의흥삼군부로 귀속되는 과정에서 중추원의 군정기능 허명화

→ 도평의사사의 군무기능도 소멸되어 도평의사사는 정무만을 관장하게됨

 

 

2. 문무관리의 선발 임용제도 수립

1393년 무과와 리과 신설 → 관리선발 제도를 문무의역 음양 리과 및 문음의 7과로 정리

→ 직무중심으로 지배층을 재편성하려는 의도

 

 

3. 지방제도 개편

① 1393년에 관찰사제도 복구, 각 도에 전임행정기관 배치

→ 중앙정부의 지방통제 강화를 의미함

 

② 지방군현의 행정기관인 수령의 자격을 6품관 이상인 참상관으로 고정시킴

 

③ 종래 속현이나 향 부곡 소 등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던 행정구역을 혁파하여 주현에 통합시킴

 

④ 군현제 재조정

→ 토착향리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을 한층 강화하는 것

 

 

4. 왕조 개창 공신 포상

: 자신의 지지세력들을 개국공신과 원종공신에 책봉하여 토지와 노비 분급

 

 

5. 국호 개정

: 즉위직후 명나라에 조선과 화령 중 국호를 채택해줄 것을 요청

→ 조선으로 택정되어 태조 2년부터 사용

 

 

6. 고명책인문제

: 여진문제와 세공문제로 양국관계가 순조롭지 못하여

명은 조선국왕의 금인과 고명을 보내지 않음

 

[고명]: 왕위를 승인하는 문서

[금인]: 국왕의 인장

 

//* 예로부터 중국의 역대왕조는 이웃의 여러나라에서 왕이 즉위하면

이를 승인한다는 뜻에서 의례적으로 고명과 인장을 보냈는데 이 절차를 '고명책인'이라 하였다.

 

그러나 태조 이성계는 명으로부터 고명과 인장을 받지 못하여

'조선국왕'의 칭호를 사용하지 못하고 '권지고려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이 문제는 1400년(태종 즉위년)에 가서야 해결되었다. *//

 

 

7. 한양천도(1394)

: 고려 구세력의 전통기반인 개경을 떠나

새 왕조의 새로운 정치기반을 구축할 필요에서였다.

 

//* 새 도읍에 여러 궁궐 + 종묘 + 사직 및 관아 등 구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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